각 종교마다 기도하는 법이 다를 것이다.
1. 눈을 뜨고 기도를 해야 하나
2. 아니면, 감고해야 하나
3. 아무렇게 해도 괜찮다. 라는 세 가지의 질문을 해본다.
이렇게 유치한 질문을 하는 것은 어느 논문에서 황당한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안산 상록수와 관련된 자료를 찾고 있다.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소설이 사실로 둔갑되었고, 지금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선양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최 용신의 권위자라고 자처하는 중앙대 김호일교수의 논문에 "그녀가 3학년이던 1931년 4월 교내 동맹휴학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교장 케이블(Cable. E. M. Rev)이 채플시간에 눈을 뜨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학생들이 항의 데모를 했던 것이다. 이 항의 데모에 독실한 신자였던 최용신이 주동자였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두고 농촌에 투신했다고 적고 있다.
가장 유치하게 말하면 둘 다 기도시간에 눈을 떴다 감았다 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최용신이 성령을 받아서 눈을 감고도 기도시간에 일어난 사실들을 훤히 보았다든지...,...,.
불교에서는 기도와 참선시간에 절대로 눈을 감지 말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눈을 감으면 헛것이 보이거나 금방 혼침에 들어 비몽사몽이 되며,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꿈 형태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혼침상태를 유독 좋아하는 기독교는 눈감고 기도를 해야 하는가 보다. 이것은 가끔 교회에서 기도시간에 일어나는 이해 할 수 없는 행동들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위에 사건을 비추어보면 최용신은 거의 광신도 인 듯싶다.
다시 말하면 교장선생님은 직위 상 채플시간에 수업의 진행효과를 알아보기 위해서, 꼭 눈을 감고 기도하라는 규칙이 있다손 치더라도 눈을 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용신은 그것을 문제 삼았다, 그렇다면 최용신에게는 스승이라는 개념보다 오직 '야훼'가 최고이므로 교사의 입장에서 지도감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데모를 벌였다고 본다.
이 것을 사회 일반적인 평범한 시각에서 본다면 종교에 집착한 인격장애 현상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사건은 최용신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농촌계몽운동이 단순한 선교활동이라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옹호자들의 이야기처럼 민족주의자로서 독립운동이었는지에 대한 인격적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당시 거의 모든 선교활동은 일본을 옹호했거나, 미국을 대변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의 글 [ 20402 상록수 최용신을 말하기에 앞서] 참조
※※※ ※※※ ※※※ ※※※
상록수 최용신을 말하기에 앞서
한사람의 행적이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받아 후대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면,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선양하는 것은 인간의 바른 도리라 하겠다. 그러므로 그 인물을 평가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역사라는 큰 틀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특히 특정인물의 삶을 후대사람들이 재평가하여 추서 했다면 더욱 그러하다. 왜냐하면 역사의 대부분은 기득권자들의 입장에서 서술되거나 기록되어지기 마련이고, 그것을 선양하는 사람들의 어떤 의도된 목적에 이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재를 털어 개울을 건너기 편하게 다리를 놓았고, 동네사람들은 그를 높이 칭송했는데, 사실을 알고 보니 적에게 포섭되어 침략군이 쉽게 쳐들어오도록 길을 연결해준 것이었다. 그런데 후대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그 다리의 편리성이 가져다 준 이익을 내세워 찬사를 보낸다고 해서, 역사 마저 그것을 선(善)으로 인정하거나 칭송하고 선양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과거 100여 년의 역사적 사실을 국가와 민족이라는 입장에서 온전히 정리를 하지 못하고있으며, 그로 인해 해방이후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선조의 독립운동이 오히려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불러오는 부끄러운 사실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친일·친미행적이 뚜렷한 사람들 마저 독립운동가 또는 민족주의자로 추서 되어 특정집단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구한말에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역사를 조명함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외세를 끌어들인 개화파와 수구파 중에서도 ①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했던 출세지향형, ②제국주의의 특성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해 침략자들을 옹호했던 무지형, ③ 국가의 이익을 위한 애국충절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부류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1908년 3월 23일 오전 9시 미국 오클랜드역에서 유학생 장인환, 전명운은 전 한국정부 고문 겸 통감부 촉탁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를 피습하였고, 스티븐스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틀 후에 숨졌다. 이 사건은 사전 공모과정이 없었고, 조선의 애국청년과 미국의 친일분자가 우연한 조우로 발생한 것으로, 미국 변호사인 코쿠란과 바레트 등 두 명이 무료변론을 자청했다. 이 때 교포들은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했으나, 이승만은 "자신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살인자를 옹호하는 일에는 관여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한민국정부수립 과정과 독재를 유지하는 동안 스스로 테러를 저질렀다.
1905년 7월 29일 카쓰라(일본수상)와 태프트(미국 육군장관 후일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됨) 간에 이루어진 밀약으로 미국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적극 지지하는 동반자로 나섰고, 그 해 9월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보호조약이 채결되자 미국은 제일먼저 공사관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미국의 기독교선교정책이라는 새로운 식민지정책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그것 역시 정교분리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조선민중들에게 착실히 친미적 성향을 가르쳤으며, 급기야 1907년 '대 부흥회'에서 "일본에 대한 증오를 회개"해야 한다며 조선민중의 독립의지를 꺾었다, 그리고 많은 선교사들은 "현존하는 세상의 모든 권력은 하느님이 그 자리에 세워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통치자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다" 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통치자, 즉 일본에 대항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세에 도전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제국주의 성향을 파악하지 못한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1897년 1월 26일자 논설에서 "그리스도의 교를 확실히 하는 나라들은 지금 세계에서 제일 강하고 제일 부유하고 제일 문명하고 제일 개화가 되어 하나님의 큰복을 입고 살더라"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조선의 유일한 살길이라고 선전하며 받아들인 미국의 선교정책이 결국 조선을 패망케 하는데 일등공신이 되었고 민족의 독립의지를 약화시키며 그 본모습을 드러내었다.
안중근 의사의 육혈포에 최후를 마감한 이등박문은 선교사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나는 일본인들의 부정행위 억제에 힘쓰려니와 여러분은 한인의 선생이요 지도자로서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하여 한인들의 부정행위를 억제하는데 협력하여주리라 믿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인들의 부정행위는 독립운동을 의미하고 있다. 그리고 1907년 부흥회 두 달 전인 그 해 5월 감리교의 해리스 감독은 Japan Times에 "이등통감의 위대한 한국 안녕의 시책에 대해서 선교사들은 충심으로 동의한다."라는 글을 기고했다. 안중근 역시 서구문물을 받아들여 조선민중 개화시키기 위해서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지만 그의 애국충정은 이등박문의 사살로 이어지면서 독립운동사의 큰 획을 긋는다.
당시 정교분리를 주장했던 선교사들이 일본을 어떻게 지원했는지에 대해 해리슨의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1907년 정미조약과 고종의 양위로 야기된 국정에서도 "선교사들의 지휘아래 한국교회는 동요에 휩쓸리지 않고 교인들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는데는 근본적으로 국제정세에 어두운 고종의 판단오류에 기인하고 있으나, 미국의 비호와 일본의 묵인 아래 백인우월주의에 빠진 선교사들은 양대인으로 대접받으며 사실상 조선의 치외법권의 신분을 유지했다.
최용신은 위와 같은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의 식민지전략을 옹호하고 일본의 조선지배를 합리화시키려 했던 미국선교사들이 키워낸 선교사의 자격으로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농촌계몽운동 역시 백인우월주의로 시작된 사회진화론과 시나브로운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시대적으로는 이등방문의 선교정책 이후 미국선교사들이 조선민중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되자 일본은 그들과 더욱 밀착하거나 견제하기 시작한 것과 때를 같이 한다. 그 예로 '성서조선 사건'을 들 수 있는데 성서조선사건에 연루 된 사람들은 '무교회주의자' 즉 온 세계가 야훼의 나라인데 굳이 교회를 지어 구원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하던 사람들로서 이들의 사상은 일본의 입장과 전혀 다른 쪽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용신은 서재필 윤치호와 같은 "제국주의의 특성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해 일본의 침략에 적극 동조했던 미국을 무조건 옹호한 무지형"이거나 무교회주의자들처럼 이 땅은 온통 하느님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독단적 이상주의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지금 현재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교회일각에서는 종교의 양심에 비추어 반성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반하여 최용신 연구자들은 그가 말하는 농촌계몽운동이 일어난 근대사에 대한 연구와 비판 없이 그저 '고등교육을 받은 처녀의 몸으로 시골벽촌에 와서 고생했다'라는 감성적인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미화시키는 문제점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일제가 조선의 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끌어들인 기독교문화를 그대로 전파시키려 했다는데 대한 이해가 없었고, 위의 지적처럼 선교활동이 일본의 침략을 돕는 일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전환되는 시점에 있었다는 점을 간과하거나 묵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최용신에 대한 교회사적 평가와 민족적 독립운동의 평가는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후에 다루겠지만 무교회주의를 신봉했던 김교신의 부탁으로 최초의 최용신연구자 라고 할 수 있는 유달영의 행보와 그의 입장을 보면 더욱 명확해 질 것이다. 유달영은 후일 회고에서 자신의 생각을 최용신이라는 인물을 빌어 조선의 여성들에게 호소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고, 그 역시 실재 사실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