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자 :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이미일 이사장 & 납북자가족협의회장 최우영 대표
사 회 : 프리존뉴스 강길모 대표
납북은 김일성의 지령 하에 치밀하게 진행된 ‘전쟁범죄’
- 2000년부터 전쟁중 납북자 관련 자료수집 및 명부 작성
- 비전향 장기수 지원 단체는 많고 납북자 지원 단체는?
- 남북화해 과정에서 인권이 무시되서는 안돼
- 정부, 북한과 계속 합의만 하고 결실은 없어
- 열린우리당, 도움 요청해도 항상 무관심
강길모 : 오늘 두분을 모시고 간담회를 가질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우선 제 얘기부터 간단히 하고 넘어가자면, 저는 젊은 시절에 주체사상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작년 가을에 국회 청문회에서도 증언했습니다만 반미청년회라는 조직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제가 가르친 친구들이 청와대, 국회 등에 포진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명백히 주사파 잔당들이 구축이 된 정권이기에 이런 정권에서 납북자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측면도 있습니다. 납북자문제의 본질적 해결은 북한 김정일 정권의 존속과도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전후납북자 문제는 최우영 대표님 때문에 많이 알려졌고 6.25 기간 중 납북자 문제는 이미일 선생님께서 노력해 오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고 과제는 무엇인지? 또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오늘 두분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합니다. 특히 지난 10년간 친북좌익 정권이 들어섰기 때문에 납북자 문제가 더욱 어려웠던 점도 있겠지만 우군이라는 한나라당은 과연 어땠는지에 대해서도 냉정히 비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이미일 선생님께서 간단한 자기소개와 소속 단체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0년부터 전쟁중 납북자 관련 자료수집 및 명부 작성
이미일 : ‘(사)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2000년 11월에 다섯 가정이 모여서 발기했습니다. 이 모임이 창설된 결정적 계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해 9월에 ‘납북자가 487명’이라고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전후납북자의 수만 합산하면 맞을지도 모르겠는데, 저희는 그 말에 워낙 충격을 받아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끝에 단체를 결성했습니다. 그 후에 백만인 서명운동 등과 각종 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정부가 당시에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명부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일부 관계자는 ‘전쟁중이라서 명부가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기록을 찾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1년만에 결국 기록을 찾아냈습니다.
처음에는 국가기록원에도 공식 문의하고 내무부와 경찰에도 문의했습니다. 통일부에선 없다고 하더군요. 다들 없다고 하는데 어느 분이 6.25 당시 서울특별시가 만든 피해자 명부를 확보한 것이 있었습니다. 일단 그걸 보자고 하니까 4,616명의 명단이 들어있고 납치-피살-행방불명 등 세가지 유형으로 정리가 돼있더군요. 1950년 서울수복 이후 작성된 중요인물들의 명부였고, 직업-소속 등 납치와 관련된 9개 인적사항이 적혀있었습니다.
이걸 일단 구입한 후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님께 심층 취재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서울 것만 있었고 전국 통계는 각 8도에서 납치-행방불명된 숫자만 있지 명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월간조선에서 두번 특집기사를 내주셨습니다.
이 기사를 본 어떤 분이 중앙도서관 서고에 사장되어 있던 자료 5권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때까지 공식적으로 도서관 목록에 오르지 않았던 자료였죠. 이걸 정부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도 통일부는 그 후에도 전쟁납북자의 공론을 꺼리고 있습니다. 북한에 불리한건 가능하면 공론화를 안하려고 하는 정권인 듯 합니다.
강길모 : 최우영 대표님은 전후납북자 관련 운동을 어떻게 시작하셨는지요?
비전향 장기수 지원 단체는 많고 납북자 지원 단체는 없어
최우영 : 제 아버지가 87년 1월에 납북되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정부를 믿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납북자 가족이라는 말을 할 수 없던 시기였고, 탄원서를 보내는 정도로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신문을 통해 북한인권에 대한 실태가 나오고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접하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기사 아랫단에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된 명단이 소개됐는데 거기서 아버지의 이름 ‘최종석’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납북되신 분이 어떻게 수용소까지 가셨는지에 대해 추적을 시작했습니다.
하소연할 곳은 없었고, 가족의 아픔을 어디서도 귀기울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정부를 믿어서는 안되겠고 가족끼리 뭉치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2000년 2월에 납북자가족모임 결성했고 일곱 가족이 모여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의 수혜자이고 싶다’고 선언했습니다.
당시에 납북자 가족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MBC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와 한국인 납치를 방송했는데 거기서 납북자 가족들이 연락처를 알게 되고 일본인 납북자 가족들을 만남날 수 있었습니다. 일본 피해자들의 가족들을 보며 우리도 한국에서 활동하게 되면 이런 단체가 생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납북자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해야 한다는 현실이 놀라웠습니다. 심지어 어떤 대학생 기자는 제게 납북자가 뭐냐고 물어봐서 충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지 않았던 언론도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납북자 가족들을 지원하는 단체가 많이 생길 거라고 전망했지만 오히려 ‘비전향 장기수’를 지원하는 단체가 더 많이 생기더군요. 피해자 가족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납북자들은 북한에서 인권의 사각지대에 몰려서 핍박받고, 우리는 한국 정부로부터의 핍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우리 편에 섰지만 정부는 아직까지 생사확인도 못하고 송환도 못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납북자 가족이 많은 이 땅에서 결과가 없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강길모 : 최 대표님은 유명한 광고 때문에 많은 분들에게 알려지시는 계기가 됐는데, 그 광고가 언제였죠?
최우영 : 2005년 10월이었습니다. 제가 고 1때 아버지가 43살의 나이로 납북당하시고.. 결국 환갑을 맞이하고도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자식된 도리로서 불효 같아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아버지 생신이 9월 23일이므로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매운탕과 술과 쌀밥을 차려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편지를 본 많은 분들이 마음을 이해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언론도 보도됐고 북한 김정일도 그걸 봤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이 당장이라도 오실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임진각에는 문안 손수건을 달았습니다. 아버님 생신이 2000년 10월 25일인데 23일에 가서 노란손수건 400장을 달았습니다.
강길모 : 파주시에서 노란손수건 때문에 나무 죽는다고 시비가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최우영 : 저는 아버지가 보고 싶으면 그 소나무에 가서 마음의 위로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인 납치문제가 부각되기 이틀 전에 그곳에 갔더니 노란손수건이 안보이는게 아닙니까? 순간 아찔했는데 파주시청에서는 도로확장공사를 위해 나무를 잘랐다고 냉랭하게 얘기하더군요. 그렇게 많은 국민들이 함께 했던 그 노란 손수건이 달린 한그루조차 보존할 수 없는 현실을 절감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좌절하지는 않았고, 납북 20주년을 맞이해서 만장의 손수건을 달기로 했습니다. 파주시청에서 또 철거하겠다고 했지만 언론에서도 도와주셨고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임진각에 직접 와서 파주시청장과 면담 중에 일부라도 남게 해달라고 부탁하셔서 지금 기념으로 남아있습니다.
납북은 김일성의 지령 하에 치밀하게 진행된 ‘전쟁범죄’
강길모 : 비록 전후 납북자 가족들이 달았습니다만 전쟁중 납북자들의 마음도 포함된 손수건이라고 봅니다. 최우영 선생님은 언론을 통해 알려졌는데 이미일 선생님은 제가 최근까지 존함만 듣고 잘 몰랐습니다. 많은 기록들을 찾아내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자료를 전쟁 중에 찾아내실 수 있으셨는지? 원래 우리 민족이 사료를 중요시하는데 최근에는 기록 무시 경향이 강했습니다. 우리처럼 기록이 부실한 정부관리 체계에서 그 중요한 자료를 어떻게 찾으셨는지가 궁금합니다.
이미일 : 처음에는 명부조차 없다고 부인하더군요(정부에서). 우리도 50년대 후반부터 연좌제 때문에 감시대상이 됐습니다. 그래서 51년에 결성된 납북자 가족 단체도 60년대에 소멸했습니다. 그 기록을 나중에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것입니다. 명부가 없으니까 한계가 있었죠. 전쟁중 납북자는 국민으로 취급받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전쟁중 납북이 뭐 대단하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쟁 중에는 죽기도 하고 재산도 잃는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그게 가능하다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발적으로 생긴 일이라고 이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객관성 확보를 위해 기록에 의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자료 수집에 나섰습니다. 2000년부터 국가기록원, 외교정책 자료실, 국방 관련 군사편찬 자료실 등.. 제가 정부 기관의 자료실은 모두 돌아다녔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김일성이 이미 46년에 ‘남조선에서 인텔리들을 데려오라’는 교시를 내렸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김일성 전집’ 4권에 나온 46년 7월 31일자 교시문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김일성 정권이 북한 전역을 공산화시키면서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종교인-지주계급을 숙청한 결과 지식인들이 없어졌습니다. 인재공백상태를 스스로 초래한 것이죠. 김일성 대학도 세워야 하고 정부기초를 만들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으니까 남한에 내려가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잡아오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그래도 전쟁 전에는 주로 회유를 했다고 합니다. 화폐를 가져와서 돈을 많이 주면서 연구소도 지어주고 했답니다. 그런데 당시 월남자가 300만명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아무리 체제 선전을 해도 공산당의 실체에 대해 워낙 소문이 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북한의 실상을 다 알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월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 중 하나도 이것이었습니다. 적화도 목적이었지만 필요한 인력을 안전지대인 평양으로 빼돌리려고 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사람을 납치해서 강제납북시킨 후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납북은 절대로 우발적인 사태가 아니라 ‘북한 정권의 치밀한 계획 하에 진행되는 납치범죄’이며,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자료가 더 있습니다. 러시아 기밀문서에 보면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즉시 식량을 모두 몰수하고 일주일 후에 배급을 해준다고 거짓말을 했답니다. 결국 서울지역의 식량난이 7~8월부터 심각해졌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식량을 준다고 선전하면서 이북으로 사람들을 올려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1950년에 남조선에서 50만을 전출하라는 명령을 받고 실행에 옮김. 전쟁과 동시에 이게 치밀하고 신속하게 실행됐습니다. 이들은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전쟁납북사건이 우발적인 범죄가 북한 정권 차원의 치밀한 공작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주력해 왔습니다.
작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저희가 5가지 명부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중복을 제외하고 96000여명의 전쟁중 납북자 명부를 추린 후에 성별-지역 등으로 분류를 시작했습니다. 납북자 중 남자가 98.2%였고 연령은 85%가 10대 후반부터 35세 사이였습니다. 자택 부근에서 잡혀간 경우가 80.3%였고 전쟁 직후 3개월간 잡혀간 분들의 비율이 88.2%였습니다. 이건 기록에 의한 분석입니다. 이런 통계분석으로 보면 전쟁중 납북이 우발적인 전쟁피해가 아니라 계획된 전쟁범죄라는 결론에 더욱 무게가 실립니다.
이 전쟁범죄문제를 국제법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지 국제변호사들이 논문을 작성 중입니다.. 이 통계분석 자료를 동아일보에서 기사로 크게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북한 노동신문에서 ‘반 공화국 모략’이라고 즉각 반박했십니다. 그걸 보고서 저희는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납북된 우리 가족들도 북한에서 노동신문은 볼 수 있을테니까 이를 통해 우리의 활동을 알 것이라고 믿게 된 것입니다. 북한 당국을 깜짝 놀라게 한 분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한 짓을 그대로 기록해서 분석했으니까요.
남북화해 과정에서 인권이 무시되서는 안돼
강길모 : 결국 북한은 납북을 통해 인력수급정책을 실행한 것이군요. 일제의 강제징용과 유사한 전쟁범죄라고 봐야 하는데 현재까지는 이런 인식이 보편화되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전쟁중 납북자 모임에는 현재 몇가족 정도가 소속되어 있으신가요?
이미일 : 약 700여 가정입니다. 가족들이 모이면 대부분 2세가 70대입니다. 상당히 안타까운 부분이죠. 지금과 같은 시기에 해결 안하면 과연 언제 해결이 가능할지..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생존해 계신 분들도 빨리 뵈어야 하고..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일이라도 알려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저희가 사실 무리하게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할 수 있는 것조차 정부가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은 말이 없으실텐데 뭐가 그렇게 힘든지.. 한민족이라면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남북문제에서 가장 큰 문제가 6.25 전쟁 문제인데.. 이게 해결되지 않고서 어찌 남북문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저에게 부탁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전후납북자 특별법부터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전쟁납북자 문제를 다루겠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그건 이해를 하거든요? 그분들이 먼저 도움을 받아야 할 입장이고, 저희는 개별지원보다는 명예회복 차원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납북되신 분들 중 수천명이 공무원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대한민국의 공직에 계시지 않으셨으면 잡혀가시지 않았을 확률이 높거든요? 당연히 국가에서 유공자 내지 보훈대상자로 지원해 줘야 하는데 대북경제지원만 하고.. 이것도 북한 주민들에게 주는게 아니라 김정일 정권에게 지원하는 것 아닙니까?
남북화해협력? 좋습니다. 당연히 그 길로 가야지.. 언제까지 갈라져서 이렇게 싸울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러나 남북 화해로 가는 길에서 어느 한사람의 인권이라도 무시되거나 파묻혀서는 안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문제를 이념적으로 다루기보다는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저희를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강길모 : 납북자 가족에 대한 구제 및 피해보상-명예회복 등.. 특별법 얘기도 나오는데.. 법이 제정되서 발의된 것이 있는지요?
이미일 : 전후납북자특별법이 소위는 통과했으나 시행되는 법은 없습니다. 조만간 본회의에 상정되리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통일부에서 ‘전쟁중 납북자는 곤란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없었던 얘기처럼 덮어놓으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안되죠. 저는 선의로 ‘전후납북자부터 하라’고 도와드리려고 하는데 통일부는 이걸 이용하려고만 하고 뒷전으로 미뤄둠.
전쟁납북자 특별법안을 전여옥 의원이 통외통위 활동 시절에 이미 발의하시는 했습니다. 이건 지금 행자위로 토스되어 있습니다. 통일부에서 이걸 못하겠다고 하고 행자위로 보낸 것입니다. 김문수 의원도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정부가 계속 나몰라라 할까 걱정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희의 선의를 이런식으로 이용하면 안되는 것이죠.
강길모 : 인식의 전환을 위한 다양한 홍보가 필요할 듯 합니다. 전후납북자특별법은 내용이 쓸만합니까?
최우영 : 납북자 가족들 입장에서는 법적 지위를 위해 법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를 1차적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는 납북자 피해가족들의 90%가 가장이 끌려갔으므로 힘든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또한 과거 연좌제로 인래 가난의 대물림도 겪으셨죠. 피해자들을 위한 지원 및 생사확인+송환에 심혈을 기울였는데요, 가족들의 아픔과 명예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법도 가족들 마음 달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법 제정의 진도 현황은 새로운 것이 아님. 2000년에 이미 강삼재 전 의원이 이미 발의했지만 폐기됐고 이번에 두 번째 시행되는거라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이 법이 통과되고 시행령까지 와서 가족들에게 명예회복이라도 되고 생사확인이라는 의무가 국가에게 지워진자는 것에 의미를 두고자 합니다.
북한과 계속 합의만 하고 결실은 없어
강길모 : 지난번 2005년이었나요? 전쟁중-전후 소식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생사확인을 합의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미일 : 아까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하루가 시급한 상황입니다. 2002년 9월 적십자회담에서 생사라도 알면 좋겠다고 성명서도 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3번을 내리 합의하기로 협의했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적십자실무회담 가면 납북자 얘기도 못하고 있습니다. 금강산 면회소부터 먼저 짓자고도 합니다.
전쟁중 납북자는 합의가 먼저 됐고 전후납북자는 3번째 합의입니다. 보고서 쓰면서 계산을 해보니까 총 8번 합의를 했더군요. 그리고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음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유엔에 편지를 쓰려고도 합니다. 지난 5년간 단 한건의 결실도 없었다는게 중요합니다.
게다가 명칭만 흐리멍텅하게 납북자에서 ‘행불자-실종자’로 바꿔서 북한 입장만 생각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게 무슨 협상인가요?
강길모 : 과거 대한민국엔 사회주의 혁명 꿈꾸는 좌익들이 많았습니다. 주체철학이 그때 그들의 철학이었죠. 당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자들의 99%는 주사파 운동을 했습니다. 이들이 지금 대한민국 권력의 핵심입니다. 비전향장기수 지원 단체는 생겨도 납북자 지원 단체는 안생기고 있는 것도 이런 현실과 연관성이 있겠죠.
일본쪽 납치자 가족들과 만나보신 느낌은 어떠신지요?
최우영 : 처음엔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느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구미씨 부모님을 만나고 나서는 국적은 틀리지만 같은 아픔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또한 그 피해자 가족들을 둘러싼 36개의 일본 내 지원단체들을 보며 부러웠습니다. 북한에서 ‘한겨레-한민족’이라고 하면서도 일본인 피해자들만 먼저 챙기는 걸 보면서 당혹스러웠습니다. 남한 내 피해자들은 무시하고 일본에는 사과까지 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국가다워야 한다는 게 뭔지를 알게 됐습니다.
두번째로 일본에는 피해자들의 마음에 국민들이 다가와 있습니다. 어떻게 행동할지 국민들이 고민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기도 합니다. 또 정부 뿐 아니라 일본인들이 하나로 뭉쳐 메구미씨 부모님들의 눈물 닦아주겠다고 결의하는 걸 보고, 저런 것들이 국민을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마음을 가지게 됐습니다.
우리 쪽에서는 이 무능한 정부 때문에 제 아버지를 비롯해서 많은 피해가족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 가족들을 위해 정부가 뭔가 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98년부터 일본에서 열리는 국민대집회에 참가한지 어언 10년째입니다. 이번에도 대집회가 있어서 이미일 회장님과 함께 참가하고 호소했습니다. 그래도 거기 가면 국민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떻게 발전하는지를 보기에 희망을 안고 옵니다.
우리도 국가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한민족이라는 북한에게 큰소리로 얘기할 수 있는 정부를 기대합니다.
더 충격적인 건 일본인 피해자들과 함께 스위스의 적십자사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일본인 피해자들이 얘기하기 전에 아시아담당관이 일본정부로부터 정보를 받아오고 있기에 잘 알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국인 납치피해자의 현실을 얘기하는 순간 ‘한국 대통령에게 알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 순간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김대중 대통령이 알고 있다’고 답변하니까 ‘한국에서의 여론화를 위해 힘을 기르라’고 UN에서 조언을 하더군요.
한국 내에서는 국제사회에 호소하라고 했고, 거기서는 한국 내에서 하라고 한 셈입니다. 정부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절감했습니다. 외교통상부가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국제사회에 호소하고 있는지 의문스럽습니다. 기초적 자료부제공부터 정부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강길모 : 전후납북자들은 많이 모이시나요?
최우영 : 이 문제가 개인적 삶에서 도움 안되는 분들도 계십니다. 떳떳히 얘기하는게 쉽지 않은 상황일 겁니다. 주변에도 납북자 가족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잘 안보이십니다. 아마 가슴 속에 아픔을 안고 사시는 중일 거라고 봅니다. 아마 통일부에서 정보 확보한 사람들은 절반 정도일 듯 합니다.
나머지는 납북된 분의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고 제사를 지내기도 합니다. 지금 활동하시는 분들은 소수라고 봐야죠.
강길모 : 정부나 외교관료쪽에 있는 386세대 중에는 주사파 출신들이 많습니다. 이 친구들은 북한 정권에 충성한 추억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북한 권력이 대한민국 국민을 납치하지 않았다고 버틸 듯 합니다. 객관적 사실이 아무리 입증되도 이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을겁니다.
마치 자발적인 월북이었던 것처럼 여론을 조성하고, 억류라는 얘기는 절대 안할 것입니다. 이번에도 대북지원 비료가 올라갔던데 제대로 협상을 하는 것이면 뭐 좀 줄때마다 반대급부도 얻어내야 합니다.
문제는 협상능력이 아니라 기본적 인식이라고 봅니다. 최근 한나라당도 김정일 눈치를 보는 것 같은데 이 친북좌파정권은 어떻겠습니까? 이런 정권 밑의 관료들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재정 장관이 납북자문제를 다룬다고 하는데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반발 억제를 위한 립서비스 수준이고, 본질적 해결은 어려울 것입니다.
이 정권은 북한과 친한게 아니라 ‘종속관계’입니다. 김정일은 이 정권을 어린애로 볼 듯 합니다. 이런 권력관계이므로 문제가 해결되기 힘든 것이죠.
두분이 노력해 오신 것에 우리가 더 부응해서 국민적 인색을 넓히고 한나라당을 각성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도 김문수-전여옥 의원 정도나 진지하게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90% 이상은 납북자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수준입니다. 그간 한나라당을 대하시면서 어떤 점들이 고마웠고 어떤 점에 실망하셨는지요?
열린우리당, 도움 요청해도 항상 무관심
이미일 : 사실은 제가 입법문제 때문에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자주 만납니다. 전여옥 의원이 대표발의를 했을 때에는 회관 로비에서 납북사건 관련 자료전시회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의원이 많이 도와줘서 감사했습니다.
박근혜 전 대표도 두 번 만나뵌 적이 있는데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도 있고, 육영수 여사 얘기도 하면서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최근에도 북한에서 한나라당이 정권 잡을 경우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계속 협박하고 있죠? 사실 이러니까 한나라당도 곤혹스럽기는 할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분이 대통령이 되어야 국민들이 행복하다고 봅니다.
열린우리당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희상 의원이 의장이었던 시절에 당사를 저희 임원들 두세명이 찾아갔는데 발도 못 들여놓게 하더군요. 그래서 ‘닫힌너희당’이라고 별명을 지었습니다. 통외통위에서는 그래도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찾아가서 자료도 주고 하는데 애시당초 우리에게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습니다.
최우영 :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납북자 문제가 표가 되지는 않는 상황입니다. 최근에 가장 열심히 관심을 가지시는 분은 한나라당 송영선 의원입니다. 황우여 의원도 북한인권위원장을 하고 계시면서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박근혜 전 대표는 2000년도부터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셨고. 일본인 피해자들 소식 듣고 시간도 내주셨습니다. 정형근 의원은 한국인 납치 피해자 가족들의 생사확인을 해주셨습니다. 대단히 의미 있는 실질적 도움을 주셨죠.
김문수 경기지사는 의원시절에 직접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나도 과거에 감옥에 있을 때 독방을 썼는데 가족들이 면회왔다는 소식만 전해 들어도 희망을 가졌다. 우리의 소리가 현실을 바꾸지는 못해도 북한의 가족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또 나경원 의원과 전여옥 의원, 김용갑 의원도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민주당 김민석 전 의원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영등포 살때 당시 그분이 지역구 의원이었는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황당한 경우가 모 의원인데.. 이름은 밝히기 어렵지만 이분이 미국 북한인권법 통과에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에게 ‘북한인권법은 반대하시더라도 한국인 납치-피해자들을 위해 힘을 써달라’고 부탁드리니까 그분은 ‘나는 민주화운동하면서 감옥까지 다녀왔는데 당신은 아버지를 위해 뭘 했느냐’고 극언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나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원님은 그 댓가로 국회의원도 하셨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은 저에게 ‘납북자 공부 더해라’고 하시더군요.
민노당 김혜경 전 대표를 찾아간 적도 있었는데 그때도 외면당했습니다. 나중에 당혹스러웠다고 대변인이 얘기하시더군요.
이미일 : 예전에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은 ‘남한에 내려온 북한사람들은 어떡하냐’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임채정 국회의장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길모 : 열린우리당과 청와대가 원래 그런 집단입니다. 친북세력이 정권을 잡자마자 친일청산-과거청산에 매달리고 반미의식 조장해서 북한권력과 공동행보를 하고 있습니다.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고 집권여당 의원이 되고 언론-시민단체까지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도 정신차리지 않고 대세가 저쪽이라는 착각 하에 좌파 벤치마킹을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씩 해주신다면?
이미일 : 이런 시간을 갖게 되서 감사합니다. 이게 바로 큰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론화를 위해 별의별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16km를 걸으면서 더운 여름에 캠페인도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바라는 건 가족들의 소식을 듣고, 돌아가셨으면 유해라도 모셔오는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분들이 우리 선조였다는 걸 국민이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분들을 역사에 중심으로 모셔야 합니다.
지금 북한는 그분들을 숙청해 놓고는 애국열사릉에 묻어놓고 체제 선전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분들은 대한민국을 세우신 분들이며, 이분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특별법 제정이 당면과제입니다. 당신들이 세운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했다는 걸 돌아가신 분들이라도 아실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자라나는 우리 2세들은 386세대와 달리 친북좌익 논리에 덜 노출됐으므로 젊은이들에게 인권의 소중함을 더 알려야 합니다. 선진국 중의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자회견을 해도 언론에서 오지도 않습니다. 미디어도 좌익성향이 많고.. 우리 단체의 성격을 안 이후로는 조선-동아일보만 빼고는 보도조차 안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홍보인데,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자리가 아주 소중한 자리입니다. 강길모 대표님도 만나뵙고 과거 주사파에서 전향하셨다고 하니까 더욱 감동입니다.
북한은 주민을 탄압하고 신권정치를 하는 종교집단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북한 체제에 대한 세부적인 건 저희는 잘 모릅니다. 북한을 잘 아시는 분이 앞장서서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잘 아시는 분들의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이런 범죄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남북한이 진실로 서로를 안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최우영 : 오늘 귀한 자리 마련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납북자 문제는 가족사랑의 문제이고 무조건 인도주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해결이 가능합니다. 이 문제가 이념을 벗어나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들만의 힘으로는 어려운 면이 있고, 특히 여자가 하긴 더욱 어려웠습니다.
노란 손수건을 잊지 마시고 도와주신다면 힘이 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건 행동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간 관심을 가져주셨다면 이젠 행동할 때입니다.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하고 행동해 주신신다면 우리 가족들은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강길모 : 한분씩 따로 모시고 두세시간씩 말씀을 들어도 모자랄텐데 한꺼번에 좌담회를 하니까.. 다음에 기회가 또 있으면 한분씩 모셔서 더 상세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특히 세부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국민 전체가 되는 날까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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