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지니아 총격사건 단상 ⓒ 격암
사태가 심각할 땐 그냥 입 닥치는 게 최고입니다. 사람이 수십 명이나 죽어나간 앞에서 쉽게 이거다 저거다 이야기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러니 이글은 어쩌면 쓰자마자 지워져 버릴지도 모르지요.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결론 따위는 없을 겁니다.
몇 가지 질문들이 제기됩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사람에게 미안해해야 하는가. 법적으론 잘못한 거 없지요. 그러나 충격 받은 미국사람에게 미안해하는 마음 가져서 나쁠 거 없습니다. 미국 군인이 한국에서 만행을 저지르면 아무래도 미국전체에 대해 인상이 안 좋아집니다. 미국이 한국을 우습게 봐서 이런 일을 저지르는 거 아닌가하고 말입니다.
너무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합리화의 동물이라 이 사태를 합리화해 보려고 합니다.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려고 합니다. 부지런히 남의 탓을 하지요. 현지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범인은 자랐다고 합니다. 그래도 미국방송에서는 당장 한국인이라고만 말합니다. 미국사회도 이런 잔혹한 살인범을 자신들이 키웠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누가 이런 괴물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생각은 상당기간동안 세상을 괴롭힐 것입니다.
미국에서 총기를 쉽게 구입하는 것에 대해 비판이 일 테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아마 이것은 한국인이라는 외국인이 저지른 짓이라는 점을 부각시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극 앞에서도 부산하게 움직이며 이건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범인과 비슷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죄 없이 커다란 압박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어린 시절에 미국에서 유학한 아이들,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계들. 그 학교의 한국계학생은 아무도 뭐라고 안 해도 커다란 압박감에 시달릴 것입니다.
당연히 가장 커다란 피해자중의 하나는 범인의 부모입니다. 자식이 죽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아이를 길러냈다는 주변의 압력 특히 한국인들로 부터의 압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의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압살해 버려야 할까요?
한국과 미국문화의 절충은 사실 모험입니다. 양쪽의 장점만을 따오는 극상의 결과도 나올 수 있습니다만 양쪽의 단점만을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올 확률도 매우 매우 큽니다. 부모와 가족과 교우관계 등이 아주 훌륭한 경우만 결과가 좋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은 자기합리화의 동물이고 문화란 책임과 의무에 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두개의 문화를 동시에 가지는 경우 아주 쉽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자기 편할 때 두 쪽 중 하나를 택한다는 겁니다. 부모에게 돈 타 쓰고 떼 쓸 때는 한국아이가 되었다가 부모의 통제를 받아야 하고 부모에게 책임을 져야 할 때는 서양식이 되기 쉽습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도 아이에게 뭘 해줘야 할 때는 편한 쪽으로 하고 받아야할 때는 또 자기 편한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이기적이 되기 쉽고 이것은 교육전반을 붕괴시킬 수 있습니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외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 중에는 한국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교육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조금 좋아졌지만 전에는 자식들이 한국어를 잊어버려도 그냥 내버려두는 집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가지지 못한 채 크는데 미국에서 10년을 살아도 미국인으로 완벽히 변신되지도 못합니다. 아예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2세, 3세도 완벽한 미국인으로 대접받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무슨 공식적 차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말하자면 한국에서 무슨 일 일어나면 너희나라는 왜 그러냐고 묻지요. 그런 겁니다. 어디에도 정체성이 없습니다.
미국 사회라는 곳이 사실 외로운 사회입니다. 자유가 넘친다는 것이 뭘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자유로운 세상이란 모두가 모두에게 타인이 되는 세상입니다. 모든 만남과 감정의 교류는 다 속박을 발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한 자는 극단의 외로움을 가지게 됩니다. 강력한 유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성과의 관계가 극단에 이르는 단 한순간뿐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연기처럼 사라질 수도 있고 실제로 대부분 그러는 것이 현실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가 아주 조금의 이성만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가족이거나 친척이거나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거나 하다못해 그가 사랑한 강아지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의 살인행각은 그가 더 이상 그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마치 마네킹에 사격 연습하듯이 지치지도 않고 무수한 사람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 범인이 지금의 나를 보면 슬퍼할 사람이 단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런 행동은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건 간에 그는 어마어마한 무의미의 빙하 속에서 살아있던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사람을 수십 명이나 죽이는 존재는 사회적으로 괴물입니다. 괴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괴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 괴물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생각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 생각의 고리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커다란 사회적 여파를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괴물은 두렵고 사건은 끔찍하지만 그저 입을 닫아버리고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는 이유입니다.
피해자들에게 머리 숙이고 이 사건으로 충격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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