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질서' 창조 가능한가
DJ노믹스 1년-신자유주의 논쟁의 허와 실
김대중 정부는 자신의 경제노선에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보여왔다. ‘빈익빈 부익부’ ‘노동운동 억압’ ‘고용을 희생으로 한 지나친 물가 안정’ 등 80∼90년대 서구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낳은 부정적 유산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정부는 자유방임주의를 연상시키는 신자유주의 대신에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를 자신의 경제철학으로 내세운다.
재벌 개혁, 문제는 방법과 속도다
독일 프라이부르학파를 산실로 태어난 질서자유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이름으로 적용됐다. 질서자유주의와 자유방임주의는 한가지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난다. 자유방임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보이지 않는 손’(시장)에 의해 스스로 결정된다고 본 반면, 질서자유주의는 경쟁상태가 파괴될 경우 정부가 적극적인 ‘경쟁촉진정책’을 통해 개입해 경쟁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질서자유주의는 사회적 시장경제와도 큰 차이가 난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경쟁을 보완하는 요소로 ‘사회보장’을 정부 역할로 인정하는 반면, 질서자유주의에는 이것이 없다. 질서자유주의가 사회적 시장경제보다 더욱 신자유주의적 성격이 강한 셈이다. 게다가 학계 일부에서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유럽판 신자유주의로 분류하기도 한다. 실제로 80년대 케인스주의에 바탕한 독일의 복지국가 모델을 축소하기 위해 헬무트 콜 전 총리가 내세웠던 게 바로 사회적 시장경제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등에서 ‘시장원리와 어긋난다’며 ‘제논에 물대기식’ 비난을 퍼붓는 속에서도, 정부가 그동안 나름대로 재벌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것은 질서자유주의가 강조하는 경쟁정책과 관련있다. 재벌체제가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으며 시장의 작동을 막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꿔내는 것은 정부의 임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춰 문제는 재벌개혁을 위한 정부 개입 자체가 아니라, 그 방식과 속도였던 셈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7일 대기업 빅딜 합의까지 재계자율 합의의 이른바 ‘시장친화적 방식’을 고수해왔다. 유종근 대통령 경제고문이나 경제수석 재직 때 김태동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내세웠던 ‘고금리를 통한 구조조정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여기에는 미국과 IMF 등 외부의 입김이 컸던 게 사실이다. 빅딜에 대해 미국·IMF는 애초 ‘시장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우려를 나타내다 얼마 전 ‘무언의 지지’쪽으로 돌아섰다. 그 분수령은 지난해 11월 빌 클린턴 대통령의 한국 방문 때였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과연 빅딜이 질서자유주의의 핵심인 ‘경쟁질서’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학계에서는 오히려 빅딜이 국내시장의 독·과점 체제를 더욱 깊게 할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한 편이다. 빅딜이 ‘국내 경쟁질서 형성’보다는 ‘해외시장을 겨냥한 규모의 경제 육성’이라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8일 지주회사 허용에 따라 이런 우려는 더욱 커졌다.
사회협약 대실험 노사정위원회도 사문화
정부의 부인에도 신자유주의는 노사관계 분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80년대 이후 서구에서 노사의 대등한 계급타협에 바탕한 조합주의(corporatism)가 신자유주의에 밀려 퇴조하던 것과 달리, 노사정위원회가 ‘사회협약’의 실험으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점점 사문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 분야에서는 일부 노동조합의 저항에도 정리해고제가 관철되면서 미국식 인원감축과 연봉제로 대표되는 임금체계가 도입되고 있다.
사회복지를 확대하면서도 동시에 수혜자의 자조(self-reliance)를 강조하는 것에서도 신자유주의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서유럽에서 사회복지가 일부 젊은층의 ‘도덕적 해이’를 일으키는 현상에 대한 우려를 우리나라에 무리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질서자유주의가 케인스주의와 달리 소득 격차와 분배적 정의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있다.
질서자유주의의 이런 성격은 김대중 대통령이 한편으로는 부정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에둘러 강조해온 아시아적 가치들, 이를테면 한국사회의 공동체적이고 사회통합적 특성과도 양립하지 않는다. 김 대통령은 지난 94년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 등을 통해 리콴유 싱가로르 전 총리나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 총리와 논쟁하면서 아시아적 가치에 부정적 태도를 보여왔다. 일부에서 ‘민주적 시장경제’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미국과 IMF의 입맛에 맛는 외교적 수사로 바라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미국과 가급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 국민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고통분담론 역시 평등과 사회통합의 요소를 강하게 간직하고 있는 아시아적 가치와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안에서 아시아적 요소는 ‘사회갈등을 무마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단’ 정도로 사고되고 있다는 게 진보학계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질서자유주의는 애초부터 소득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소비자주권의 경제체제”라는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 한 고위관계자의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금의 분배상태가 적정하다거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앞으로 그렇게 바꿔나갈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다. 참고로 지금의 고위 경제관료 대부분은 87년 이후 이뤄진 노동자계층의 임금 인상이 지나치게 높았다고 보고 있는 편이다.
경영 혁신보다는 민영화 일변도의 공공부문 재편과정도 신자유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독점체제를 깨뜨리고 경쟁체제를 도입해 효율성을 높인다는 게 정부의 민영화 명분이지만 실은 해외매각을 통해 재정적자를 보전하겠다는 게 정부의 본심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민영화 대상들이 주로 흑자를 내고 있는 알짜배기 공기업이라는 데서도 이것은 여실히 드러난다.” 노사정위원회 공공부문 특별위원회 공익위원들의 한결같은 얘기이다.
그렇다고 정부의 경제정책에 신자유주의적인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지난해 7월부터 적극적 재정지출을 통해 케인스주의적인 ‘경기부양’을 하려 하고 있다. 최근 강봉균 청와대 경제수석이 올 상반기에 대대적인 경기부양을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것은 질서자유주의에 바탕한 신자유주의가 정부 재량에 의한 인위적인 경기순환 조절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점과 배치된다. <국민과 함께 내일을 연다>에서 “(질서자유주의가) 재정운영을 통한 총수요 조절을 정당화하는 케인스 이론이나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를 추구하는 복지주의만큼 확대된 정부의 역할을 주문하는 것은 아니다”(61쪽)고 쓰고 있다.
국민적 참여도 결국은 ‘권위주의적 동원’
IMF의 요구를 받아들인 뒤 이를 통한 구조조정론이 우량 중소기업을 포함해 2만2천여개에 이르는 중소기업의 대량도산을 부르며 실패로 끝나자,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경기부양이 먼저냐, 구조조정이 먼저냐’는 소모적인 논쟁도 결국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질서자유주의에 바탕한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이 현실과 부닥칠 때마다 옛 사고에 젖은 경제관료들이 득세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한신대 윤소영 교수(경제학)가 김대중 정부를 ‘신자유주의적 국가주의’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관철에 옛 관료집단의 힘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뤄지는 국민의 참여는 ‘민주적인 동원’보다는 ‘권위주의적 동원’이기 쉽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겨레21 1999년 01월 14일 제241호 조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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