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의 망명지도자 달라이 라마가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많은미국인들이 그의 '한 말씀'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올들어 가장 더운 날씨를 기록한 지난 2일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한복판의 워싱턴 몰(Mall)을 메운 5만여 청중들의 얼굴에는 멀리 단상에 자리잡은 달라이 라마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맨 앞줄에는 불교신도인 배우 리처드 기어가 모자를 쓰고 티베트 승려들 속에 앉아 있었다. 달라이 라마의 무엇이 이들을 워싱턴 몰로 오게끔 했을까. 노란색 가사 위에 붉은 장삼을 걸친 달라이 라마는 "미국 경제가 보인 급속한 성장은 정신적인 만족을 충족시킬 수 없다"면서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된다면 불행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물질적 부는 한계가 있다면서 "보석 반지를 낄 수 있지만 손가락은 오직 열개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달라이 라마는 이어 빈부격차 문제에 관해 언급, "이곳이 세계 최고 부자나라의 수도이긴 하지만 가난한 사람도 많다"면서 "이것은 도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잘못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중국의 티베트 지배에 대해서는 대화와 합의가 갈등과 억압을 극복할 것이라고 완곡하게 언급했다. 달라이 라마가 투박한 영어이긴 하지만 청산유수처럼 쏟아내는 설법에 청중들의 얼굴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청중들이 가장 강한 반응을 보인 부분은 "많은 문제는 인간이 만든 것"이라며 정신적 행복을 강조할 때였다. 우리로서는 너무나 익숙한 말이지만 미국 사람들에게는 신선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었다. 사상 최장기 경제호황의 과실을 누리고 있는 미국 사람들의 마음 속을 들여다본 느낌이다.
형편이 좀 나아졌다고 흥청망청식 소비행태를 보이며 어려운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한국의 일부 부유층에도 달라이 라마의 설법은 의미가 있어 보였다.
(경향신문 2000/07/04 기자메모)워싱턴특파원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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