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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를 거부하라

 

인터넷을 놓고 벌어지는 투쟁

기억하시겠지만 인터넷은 공공의 창의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공공의 주도에 의해, 국가기관에 의해 개발됐는데, 이 공공의 성취물이 불과 수년 전에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사기업에 넘어갔습니다. 1995년이었지요. 그것은 엄청난 선물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공공재가 사기업에 넘어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모든 결정이 비밀리에 이뤄졌음은 물론입니다. 이제 사기업은 권력을 다원화하고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도구로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려 합니다. 지금 투쟁이 벌어지는 분야지요.

그렇습니다. 다자간 투자협정이 무산된 것도 인터넷 덕분이지요. 시애틀에서의 성과도 마찬가집니다. 동티모르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촘스키 교수는 1975년 동티모르가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강제 병합된 직후부터 세계 언론과 지식인 사회의 침묵 속에서도 인도네시아 군이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을 규탄하고 세계 여론에 호소했으며, 인도네시아 군에 대한 미국의 부도덕한 지원을 폭로해왔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동티모르에서의 만행에 대해 수많은 저항과 데모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등장하게 되자 산발적이고 개별적인 저항그룹과 데모가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의 예를 볼까요? 인터넷이 없었다면, 사파티스타 농민군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멕시코군에 의해 단 5분 만에 몰살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멕시코 내에서뿐 아니라 국제사회로부터 충분한 정보와 지지를 이끌어냈고, 멕시코 정부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터넷은 이중적입니다. 어떤 목적에 이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지요. 인터넷은 이제 거대한 홈쇼핑 센터로 변했고, 국민들을 각성시킬지도 모르는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기 위해 모니터 앞에 달라붙어 있게 만들지요. 인터넷은 거대한 시장을 창출했을 뿐입니다.

누구를 위한 세계화인가

세계화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장교수께서 자본의 이동을 언급했는데, 그것도 세계화의 한 양상이지요. 여기서 주목할 점은 사람의 이동이 아니라 자본의 이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자유무역을 신봉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자유무역의 근본 원리임을 간파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갈 수 없다면, 자원이 적절하게 분배될 수 없고, 자유무역은 불가능하지요. 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은 또 다른 세계화의 한 양상이 될 것입니다. 인권의 세계화, 사기업이 초래하는 각종 문제들의 세계화 등도 현재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세계화가 있을 수 있지요.

세계화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세계화냐, 누구의 이해관계에 따른 세계화냐 하는 것입니다.

과학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고, DNA를 비롯한 인간 생명의 비밀을 밝혀주었습니다. 문제는 과학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했느냐 하는 것이지요. 장교수가 염려하는 것도 바로 그런 측면이겠지요. 비유하자면 과학은 마치 망치와 같습니다. 망치는 누군가의 두개골을 부수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집을 짓는 데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망치 쪽에서는 상관없지요. 문제는 과학이 어떠한 제도적 환경 아래서 발전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테크놀로지는 급속도로 변화, 발전합니다. 주로 국가의 이니셔티브에 의해서였습니다.

(1950년대 말 미국의 매사추세츠 공대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인지과학은 인접 학문적 성격뿐 아니라 오늘날의 지식기반 사회에 비추어볼 때 21세기의 핵심적 분과학문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직은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인지과학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서도 점차 높아가고 있음에 견주어보면, 인지과학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

과학 발전은 다분히 기회주의적입니다. 제 말은 사람들은 뭔가에 대해 부정확하게, 그렇지만 어느 정도 그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면 그 이해의 단계에서 연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이슈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지요. 단지 우리가 아는 한도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할 뿐입니다.

언어학을 예로 들어볼까요. 언어의 가장 명백한 사실은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이나 정신의 상태에 의해 미리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장 교수와 제가 마음만 내키면 지금 야구에 대해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다소 부적절할지는 몰라도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지요. 제가 손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언어와 인간 마음의 핵심적인 속성입니다.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언어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지 모릅니다. 언어 연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나쁜 선례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연구가 가능한 것만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주로 인간의 언어능력에 개입하는 메커니즘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이것은 시각이든 분자생물학이든 언어 연구든 마찬가지입니다. 작동되는 메커니즘과, 그것의 기저에 흐르는 원리를 터득합니다. 세포활동의 기본적 메커니즘은 후에 이런 저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과학과 관련하여 가장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는 이런 것입니다. 인간의 연구에서는 직접 실험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고양이나 원숭이를 이용해서 시각체계라든가 기타 등등을 알아냅니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고양이나 원숭이를 해부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고양이나 원숭이를 해부해서 인간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마치 박테리아를 연구해서 포유류의 생식을 알아내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지요. 그래서 새로운 비침투적 테크놀로지를 통해 두뇌의 작용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통해 직접 실험을 할 수 없는 한계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지요.

플라톤의 문제’ vs ‘오웰의 문제’

그것은 언어가 아니라 언어사용의 문제입니다. 도대체 권력자들이 진실을 말할 거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본질적으로 그들의 의도를 숨기려고 합니다.

그 문제에 관해 자주 질문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만일 목수라면 인간이기를 그만두는 것일까요? 목수는 목수 일만 해야 하고 인권에는 관심을 가지면 안 될까요? 언어학자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닌 것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정치학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정치적 언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용어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언어연구는 이성주의 원칙에 기반을 두지만, 언어 자체는 별개지요. 마찬가지로 정치적 분석은 이성주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정치 자체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그런 용어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절한 용어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주어진 정보가 적은데 인간은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플라톤 자신이 제기한 문제였습니다. 플라톤은 그 물음에 스스로 대답하기를, 사물을 이해하는 능력이 우리 유전자에 내재한다는 것이었지요. 저는 플라톤의 생각이 기본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인간은 그렇게 많은 정보를 받고서도 왜 그렇게 아는 것이 없을까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제가 ‘오웰의 문제’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정보에 대한 접근을 막으려는 기득권자들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입니다. 가령 다자간 투자협정에 대해서는 엄청난 정보가 있지만, 장교수도 아시다시피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비밀에 부치려는 세력의 치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국민들이 그것을 알면 당장 저항운동이 일어날 것을 알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한사코 그것을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알고 보면 수많은 광고업체, 홍보회사, 텔레비전, 매스미디어 등이 한 통속입니다. 이런 기관들이 전체주의 권력구조에 해가 될 수 있는 정보가 국민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놀랍지만 사실입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이것은 언제나 사실이었고 서구와 같은 자유세계에서는 새로운 형태로 출현할 뿐이지요.

권력자들이 국민을 폭력에 의해 통제할 수 있을 때는 이런 여론 조작이 중요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국민을 더 이상 폭력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면, 마침내 사상통제와 프로파간다(선전)가 필요하게 됩니다. 광고 산업이나 정치학 서적을 들춰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문제는 지식인들이 이런 관행에 일조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국민의 사상을 통제하라, 그러지 않으면 통제권을 벗어날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기술이 고안됐습니다. 오늘날 광고는 거대한 산업이 됐습니다. 기업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오직 물건을 사는 데만 혈안이 되도록 유도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켜거나 신문을 펴는 순간 우리는 사기업의 이러한 노력에 압도되고 맙니다.

지식인의 ‘건전한 양식’

지식인이란 기묘한 용어입니다. 지식인이란 기본적으로 특권적 자원을 사용할 수 있고, 특별한 훈련을 받아서 그들의 정신을 다소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특권을 누리지 못합니다. 가령 일주일에 50시간을 식당에서 일한다면, 세상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겠지요. 작가거나 대학강단에 있다면,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의 통계표를 보십시오.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지출이 OECD 국가에서는 증가했지만, 가난한 나라에서는 감소하거나 정체상태입니다. 레이건 정부 시절에 사기업에 대한 정부의 공공보조금과 위험부담률은 급팽창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자유주의의 목적입니다. 이런 것을 알기 위해 ‘뉴욕타임스’를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 자체가 거대 사기업이기 때문이지요.

지식인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건전한 양식(common sense)’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국민의 관심과 비난을 정부로 돌리려는 사기업의 선전 전략은 명확합니다. 국민들이 정부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으로 사기업의 선전술은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사기업의 끊임없는 선전의 결과 정부의 긍정적인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아예 사라져버렸습니다. 예를 들면, 세금 징수원이 오면 사람들은 그가 돈을 훔쳐간다고 생각하고 그를 미워합니다. 그가 공공기금을 조성한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지요. 정부가 공공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규제를 도입하면, 사람들은 곧바로 그에 반대하도록 훈련받았습니다.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게 되면 사기업 권력집단은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늘 국민의 불평불만을 정부로 향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국제사회는 체첸에서 자행되는 만행에 대해 목이 터져라 떠들고 있습니다. 체첸 문제는 모든 곳에서 주요 국제문제가 되었어요. 동티모르와는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국제사회는 동티모르에서 학살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지난 25년 동안 진실을 외면해왔으며,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이 인종청소에 이르게 된 배경과 관련해 인도네시아에 무기를 원조한 지미 카터에 대해서는 지금도 전혀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동티모르인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산악지역에서는 아직도 공포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지만, 미국은 단 3초 만에 이 모든 것을 중지시킬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항공기로 식량을 공수할 수도 있지만, 역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동티모르 문제를 얘기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못 보았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학살에 미국이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에 비해 체첸은 사정이 다릅니다. 체첸의 학살은 모든 미국 신문의 1면을 도배하고 있어요. 적국의 범죄행위를 비난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거울로 자신의 흉한 얼굴을 보는 것은 물론 쉽지 않겠지요. 그러면 유엔은 왜 체첸에서 벌어지는 만행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가? 아주 간단합니다. 어떤 조치를 취한다는 것은 곧 핵전쟁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차이나에서 저지른 미국의 만행에 대해 국제 사회가 어떤 조치를 취했습니까? 역시 아니지요. 왜냐하면 초강대국은 막을 수 없으니까요.

당신이 살 세상, 당신이 선택하라

아이들은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습니다. 때문에 교사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교사들은 그들의 자연스러운 호기심과 흥미를 죽여 없애고 복종과 훈련만 강조합니다. 학생들은 정해진 루트를 따라야 합니다. 대단히 잘못된 것이지요.

이 곳 MIT는 제가 다닌 초등학교와 매우 유사합니다. 가령 물리학 과목을 수강한다고 해봅시다. 이 곳에서는 강의를 열심히 듣고, 교수가 말하는 것을 잘 받아썼다가 시험지에 그대로 써내면 당장 학교를 떠나라는 통보를 받을 겁니다. 학생은 도전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교수가 틀렸다고 지적해야 하며,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의 훈련은 모두 그런 목표하에 이루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대학원은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은지 선택해야 합니다. 억압과 파괴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까? 생태계의 파괴로 우리 손자들이 더 이상 살 수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습니까? 한편에서는 유례없는 경제적 부를 누리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는 그런 세상을 우리가 원합니까? 아니면 이런 세상을 바꾸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합니다.

대담을 마친 후 니카라과에 있는 딸의 안부를 묻자 촘스키 교수는 순간적으로 딸의 안위를 걱정하는 보통 아버지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도 그는 니카라과에 대한 미국의 경제적 수탈과 인권유린에 대한 언급을 잊지 않았다.

교수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라며 손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네 살배기가 ‘국제 테러’라는 제목의 책을 들고 있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아이가 우연히 집어든 책이라고 강조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

그러나 그의 연구실을 나서면서도 한 가지 의문은 여전히 남았다. 그의 끈질기고 철저한 비판이 있는데도 미국이라는 사회는 왜 변하지 않는가.

신동아 3월호 -세계석학들이 보는 새 밀레니엄 특집
중앙대 장영준교수의 노엄 촘스키 인터뷰 내용을 편집한 내용임



2007-11-03 0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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