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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개방은 파국을 부른다

 

프랑스 좌파지식인 필립 골뤼브 교수가 진단하는 한국경제 구조조정의 명암

외환유동성 확보해도 심각한 위험 도사려

-요즘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각국의 금융시장이 심상치 않다. 미국경제의 경착륙 조짐까지 보이면서 전세계적으로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흐름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지난 20여년 동안 미국 주도로 진행된 자본의 세계화가 빚은 체제적 위험(System Risk)의 하나이다. 지난 82년 남미 외환위기, 87년 전세계 증시 대폭락, 94년 멕시코 페소화 폭락, 그리고 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계기는 다르지만 사태의 뿌리는 다 같다. 외환이동의 자유화와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 철폐의 결과이다. 무조건 효율성과 이익만 좇은 투기자본의 이동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않는 한 위기는 언제든지 올 수 있다. 한마디로 신자유주의가 위기의 세계화와 만성화를 초래했다.

-그렇지만 한번 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나름대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았나. 한국에서도 지난 2년여 동안 열심히 구조조정을 해서 외환위기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을 포함해 외환위기를 겪은 나라들은 외환유동성을 넉넉하게 확보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오판이다. 세계금융자본의 구조적 몰락위기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은 지난 2년여 동안 IMF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해 체제적 위기에 더욱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한국의 구조조정 방향이 잘못됐거나 실패했다는 얘기인가.

=구제금융을 받은 아시아 국가들의 구조조정 방향은 민간채무를 국유화하고, 외국자본 투자에 활짝 문을 열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그런데 구조조정에 따르는 비용은 대량실업과 임금삭감 형태로 주로 노동자들이 지고 있다. 타이의 경우 지난 2년 동안 실질임금이 30%나 줄었고, 인도네시아도 절대 빈곤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한국 또한 정확한 통계는 알 수 없지만, 노동자들이 손에 쥐는 실질임금은 크게 줄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동양적 가족관계를 통해 유지하던 사회안전망도 거의 무너졌다. 이에 비해 한국 부실기업의 무분별한 투자에 돈을 빌려준 외국 투자기관이 망했다는 얘기는 아직 못 들어봤다. 누가 위기를 초래했나?

-좀더 구체적으로, 지금 추진하고 있는 구조조정 작업의 어떤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 지적해 달라.

=우선 자본시장 개방과 외환거래 자유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한국경제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섣부른 자본의 세계화는 새로운 형태의 체제적 위험에 빠져들게 한다. 또 시장논리로만 접근하는 공기업 민영화도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할 수 있다. 보건, 교육, 교통, 통신과 같은 공공서비스 분야를 민간에 맡기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투기자본의 힘 아닌 사회적 합의에 따라


-한국이 IMF 구제금융사태를 맞은 것은 외부요인보다 내부요인이 더 컸다는 게 국내외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진단이다.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이 한국경제의 고질적인 내부문제를 개혁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보지 않는지….

=원인이 다른 만큼 개혁방안도 따로따로 찾아야 한다. 정경유착에 의한 국가권력의 부패나 재벌의 비효율적 경영 같은 것을 왜 국제투기자본의 힘을 빌려 개혁하려고 하나? 오히려 한국경제의 내부문제는 철저하게 노-사-정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풀어가야 한다. 지금은 국제투기자본의 사회파괴적 위험과 한국경제 내부의 위험이 시너지효과를 발휘해 더욱 폭발력을 갖게 만들고 있다.

-이미 한국은 주요 상장기업의 외국인 지분이 최대비중을 차지하고, 앞으로 새로운 성장재원을 얻는 데도 외국자본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어느 나라든 외국자본과 문을 닫고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폐쇄경제로 가야 한다는 게 아니다. 경제주권을 지키면서 개방의 폭과 대상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외국자본을 유치하더라도 한국에서 뿌리를 내릴 자세가 되어 있고, 이익이 생기면 시설투자를 확대하고 일자리도 더 많이 만들 수 있는 자본이면 적극 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한국기업을 헐값에 사 인력을 대폭 줄인 다음 다른 외국자본에 되팔아 단기간에 이익을 챙기겠다는 자세로 접근하는 투기꾼들은 통제해야 한다. 불가피하게 한국기업을 해외매각할 때 고용유지와 같은 조건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신자유주의의 근본적인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장에 자유주의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도대체 시장이 뭔가. 한마디로 소수의 돈 있는 사람이 다른 불특정 다수와의 경쟁에서 이겨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곳이다. 완전 자유시장경제로 한다면 돈 있는 사람들이 노예도 부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게 말이 되는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을 자유방임상태로 내버려두면 자율적인 규율이 작동해 최적의 성과를 만들어내고 정치·사회적으로도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선전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을 일방적으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고, 한 나라 안에서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좋은 시절에는 이익을 개인화하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는 그 비용을 사회화시키는’ 게 신자유주의 모델이다.

시장은 민주와 정의의 관점에서 통제해야

-하지만 유럽식 혼합경제 모델이 이미 미국식 경제모델에 밀렸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새로운 대안을 제안해본다면.

=영국을 제외한 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결코 혼합경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사회보장제도 또한 일부 미국식 운용방식을 채용하기만 했을 뿐 기본틀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조스팽 정권이 지난 95년에 신자유주의 모델로 사회보장체계를 바꾸려고 하다가 전 국민적 저항에 부닥쳐 포기했다.

반대로 대처 총리에 의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성공했다는 영국의 경우를 한번 보자. 영국은 섣불리 공기업을 민영화해 공공서비스가 유럽국가 가운데 최악의 수준이며, 이 때문에 지금 토니 블레어 정권은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유럽에서 사고율이 가장 높고 서비스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영국의 민영 철도회사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제를 사회정의의 관점에서 풀어갈 수 있는지.

=당연하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주처럼 받드는 이른바 자유시장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사회적 구조에 불과하다. 시장은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얘기이다. 그러나 지금 전세계적으로, 개인의 이익 극대화를 위해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시장의 논리가 사회정의의 논리보다 우위에 서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와 법치질서가 무너진다. 자유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같은 반열에 놓여서는 안 된다. 병행하기도 불가능하다. 시장은 민주주의와 사회정의의 관점에 따라 통제돼야 한다.



2007-11-05 18: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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