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경제위기 극복에 성공하고 있다는 국제 응원군의 얄팍한 칭찬도 많고, 현정부도 자화자찬하고 있지만, 디제이노믹스는 다시 원점에 선 것으로 보인다. 4월1일부터 제1단계 외환 자유화가 단행됨으로써 한국 경제는 돌이키기 어려운 전면 개방의 자유시장경제로 발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미국 미끼에 걸려 위기를 자초했던, 자본의 세계화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이 길이 앞으로 우리의 삶을 얼마나 더 고통스럽게 할 암초가 될 것인지 현정부는 너무 안이하고 태평스럽기만 하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노동자의 운명을 내외 자본의 명령에 복종케 하는 노동배제적 노선에서 더욱 확연해지고 있다. 껍데기만 남은 노사정위원회를 박차고 뛰쳐 나간 노동의 진출이라는 암초를 김대중 정부가 어떠한 방식으로 넘어갈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초국적 자본은 이미 한국 증권 시장을 좌지우지할 만큼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비중은 상장기업 시가 총액의 19%나 될 정도다. 초국적 자본의 영향력은 여러 주주총회 석상에서 발언하고 있는 펀드 매니저들의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전경련 회원 가입도 추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전경련은 내외 자본의 공동지배 연합체가 되어가는 중이다. 금융시장의 대미 종속은 한국 증시의 주가지수가 미국 증시와 함께 움직이는 동조화 현상에서도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현정부는 이런 상황을 잘 알면서 다시 외환 자유화 조처를 단행한 것이다. 이번 자유화는 기업과 금융기관의 만기 1년 미만 단기 외화차입을 허용하고, 해외투자를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며, 원화 선물거래의 실수요자 증명 원칙을 폐기하는 것을 뼈대로 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경제는 투기자본의 목마장이 되어 있는 국제 금융시장에 완전히 노출되어 제2, 제3의 외환 위기를 맞을 위험에 놓이게 되었다. 한국 경제의 운명을 자본 세계화 함정 안으로 더욱 깊이 빠뜨리고 있는 이 '몰비판-몰반성' 정책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일까.
현정부의 세계주의적 발걸음이 어김없이 착착 진행되는 것에 발맞추어, 노동 배제적 태도도 점점 더 노골화하고 있다. 정부는 노동 진영과 합의한 사항들 중 어느 하나 제대로 약속대로 이행한 것이 없다. 노동계와 맺은 최소한의 합의 사항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구조조정의 핵심 사안을 정부와 재계가 일방 처리하고도 모자라서, 정부는 새로 신설한 기업 지배구조 위원회에서조차 노동계를 배제한 채, 소액주주운동마저 비판하는 재벌측에 위원장직까지 맡게 했다. 이제 여기에 이르러 노동 배제적 신자유주의 노선은 하나의 매듭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와 구조조정 중단, 노동시간 단축, 사회안전망 구축, 임금 단체협약 안정과 산별 교섭체제 보장을 내세우면서 장외 투쟁으로 나섰고, 유보적 태도를 보이던 한국노총도 마침내 노사정위원회를 탈퇴하였다. 이 와중에 경총은 노동계의 요구 사항을 모조리 거부하는 도발적 방침을 내세우고 있고, 대검찰청은 노동계 파업에 대해 검거.구속 등으로 대처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김원기 노사정위원장 말로는, 정부 안에는 '대처 총리 방식으로 밀어붙이자'고 선동하면서 유인물을 돌리는 초신자유주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대처가 피노체트를 얼싸안으며 위로.격려한 것을 알고 있는데, 나는 김대중 정부가 부디 대처-피노체트 신자유주의 국제동맹에서 교훈을 얻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중남미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바처럼, 우리는 후진 중진국이 신자유주의적 노선으로 '성공'한 사례를 알지 못한다. 현정부가 선장이 되어 종속적 신자유주의 체제로 향하고 있는 현재의 길은, 한편으로는 초국적 자본과 재벌의 지배 연합이 발전.강화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 경향이 심화되고, 국민경제 내실이 공동화되는 종속적 20 대 80의 사회, '두 개의 국민'으로 분열된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다. 또한 이 길은 우리가 외환위기라는 유령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이제 그만"을 선언해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닐까. 디제이노믹스는 다시 원점에 서 있다
- 이병천(강원대 교수·경제학) 한겨레 시평1999.04.03(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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