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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존경할 만한 인물일까 (펌.)

 
도산 안창호는 이명박 당선자가 공개적으로 존경한다고 꼽은 인물이다. 그때 이 당선자는 안창호 선생에게 ‘안창호씨’라고 호칭하여 많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국민들은 차기 대통령이 안창호를 존경한다는 말을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였다. 대부분의 한국인은 안창호를 위대한 인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안창호는 대통령이 존경한다고 선포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인물일까? 안창호에 대한 평가에 일말의 거품은 없는 것일까?

안창호는 이 당선자처럼 기독교 신자였고 이 당선자처럼 미국의 힘을 신뢰했다. 물론 이런 점 때문에 이 당선자가 안창호를 존경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 당선자는 어떤 점에서 안창호를 첫째로 존경하게 되었을까? 과연 이 당선자는 안창호를 제대로 알고는 있을까?

안창호는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를 살다간 선각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학을 통해 입지에 성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안창호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정직’이다.

먼저 이명박 당선인은 고학을 통해 입지에 성공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안창호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정직하지 못하다는 세평을 받고 있는 당선자로서는 정직을 강조하는 안창호를 역설적으로 더 존경할 수도 있다고 본다.

안창호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를 추모하는 공원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다. 그에게는 건국훈장의 최고 수준인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안창호는 북한에서도 (남한만은 못하지만) 상급의 애국열사로 추앙받고 있다. 여기에는 그가 해방 전에 죽어서 대한민국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다만 미국에서 공부한 안창호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비슷한 수준의 자학적인 민족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다. 또한 그의 독립운동은 알려진 것처럼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으며, 활동 무대가 주로 외국이었고, 직접적인 저항보다는 실력 양성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를 그다지 높이 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안창호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거사에 연루되어 4년 형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당시 상해에 머물렀던 안창호는 독립운동보다는 순회강연과 이상촌 건설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는 김구의 폭력저항에 늘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래서 김구는 거사 사실을 안창호에게 사전에 알리지도 않았다. 윤봉길 의사의 거사 후에 김구 일행은 곧장 대피했지만 안창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대피하라는 전달을 무시하고 있다가 체포된 것이었다.

다음 일화를 통해 안창호의 진면모를 알아보도록 하자.

1927년 2월,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 안창호는 북경을 거쳐 길림에 도착했다. 길림 한인교포사회는 약간 들떠 있었다. 한인교포들은 안창호를 기쁜 마음으로 영접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안창호를 민족의 최고 지도자라고 여기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거국가’를 합창하며 안창호를 환영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나 간다고 설워 마라. 나의 사랑 한반도야.”

거국가는 안창호가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를 때에 지어 불러 유행시킨 노래였다. 식민지의 뜻있는 젊은이들은 이 노래를 애창했고, 이 노래 이상으로 안창호를 사랑했다. 안창호의 인품과 실력은 대통령감이라고 생각되었으며, 임시정부를 시답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안창호 개인에 대해서는 그가 독립운동의 선배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안창호를 탐냈던 이토 히로부미는 안창호에게 조각권을 주겠다고 회유했으나 거절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안창호는 조선 민족의 질을 높이고 힘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공립협회, 신민회, 청년학우회, 대한인국민총회와 같은 단체를 조직하고 정진학교, 대성학교, 태극서관 등의 교육기관 등을 설립하여 민족 계몽에 이바지하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은 안창호의 길림 도착 소식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청년과 학생들은 그가 묵고 있는 삼풍여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안창호에게 길림성 교포 학생들을 위해 강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안창호의 길림 강연은 이렇게 해서 성사된 것이었다.

청년과 학생들은 안창호의 강연 소식을 알리기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녔다. 그들은 길림의 주요 거리인 차루가, 통천가, 하남가, 북대가, 우마항가 등의 곳곳에 벽보를 붙였다. 벽보를 본 길림의 교포들은 마음이 들떴다.
그래서 그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도산 선생이 오셨다지요?“ 라며 서로 확인했다.

안창호의 강연은 조선 사회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마련한 것이었다. 안창호의 시국강연은 조양문 밖 대동공창에서 개최되었다. 그의 강연회는, 작년 11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나석주 의사의 추도식을 겸해 열렸다. 추도식에 참석한 길림성 3부요인과 유지들 그리고 길림성의 독립 운동가들과 청년, 학생들로 강연장은 일찍부터 빈자리가 없었다. 대부분의 청중은 서서 강연을 들어야 했다.

안창호의 강연 제목은 ‘조선 민족의 장래’였다. 그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인용하면서 해박한 지식을 강약 조절이 잘되는 어조로 설파했다. 처음부터 청중들은 그의 언변에 찬탄했다. 그가 민족의 출로가 무엇인지를 음성을 높여 강조할 때마다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그는,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민족적 역량이 낮았기 때문이라고 전제한 후, 이의 타개를 위해 ‘민족인격완성론’과 ‘민족경제확립론’을 내세웠다.

안창호는, 우리 민족이 후진국으로서 왜놈의 식민지가 된 것은 인격 수양이 적은 데 이유가 있으므로 각자의 인격을 높이기 위해 부단히 수양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서로 화합하자고 역설했다. 또한 그는 민족 경제 확립을 위해 국산품 애용과 민족 기업 육성을 강조했다. 국내에서 전개되는 물산 장려 운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안창호의 강연을 들으며 일부 청년들은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그들은 안창호의 말에서 조선이 후진국이란 말까지는 동의한다 하더라도 조선 민족이 열등하다는 주장에는 반감이 일었다. 조선이 망한 원인을 굳이 내부에서 찾는다면, 당대 위정자들의 무능과 사리사욕이었지, 열악한 민족성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민족 경제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일본은 한국의 기업을 장악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그들이 결심만 하면 한국의 기업은 파산할 수 있도록 법령으로 묶어 놓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 자본으로 민립대학 하나도 세우지 못하도록 철저히 억압하고 있었다.

안창호는 만주에서도 민족 산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권이 없는 민족에게 어느 나라가 발전소 같은 것을 만들라고 차관을 해 주겠는가? 설령 그들이 차관을 준다고 해도 어떻게 남의 땅에서 발전소를 세울 수 있는가?

그리고 안창호가 말하는 국산품 애용이라는 말도 현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었다. 외제를 쓰느냐 국산품을 쓰느냐의 문제는 극소수 상류 계층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대다수 조선인들이 생존 수준에도 못 미치는 생활을 하고 있는 터였다. 그런 그들이 언제 외제를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지를 따져 보아야 하는 일이었다. 국산품이 아니라 지옥에서 나온 상품이더라도 돈이 없어 못 쓰는 그들에게 외제를 쓰지 말라는 말은 공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요컨대 안창호의 개량주의는 독립 운동을 하되 총독부가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하자는 구호나 진배없었다.

“조선 민족은 세계에서 정신 수양이 가장 낮은 민족입니다. 우리는 때를 벗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주 독립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강연장의 기류는 안창호의 주장에 공감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물론 안창호의 강연에는 진정성이 있어 보였다.

일부 청년들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들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이 누구의 것을 베꼈는지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안창호의 주장이 민족의 투쟁 의욕을 거세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안창호의 실력 양성론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력 양성은 어디까지나 독립 투쟁의 과정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었다. 안창호의 말을 따르면 독립 투쟁은 없어지고 실력 양성만 남게 되어 있었다. 백 번 양보하여 안창호의 말대로 실력이 양성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민족적 역량을 어떻게 결집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하는가를 그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었다.

한 청년이 쪽지에 내키는 대로 적었다. 그의 질문서는 맨 앞의 학생을 거쳐 사회자를 통해 단상까지 전달되었다.

  1. 우리 민족이 열등하고 정신 수양이 낮다고 하셨는데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산업과 교육으로 실력을 배양하자고 하셨는데 왜놈들에게 나라를 통째로 먹힌 상황에서 그것이 어느 선까지 가능하겠는지요?

  3. 우리는 영, 미의 원조를 받아 독립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들이 우리를 한 번이라 도 도와준 적이 있는지요?

  4. 우리가 영국과 미국을 반드시 본받을 필요가 어디 있으며 또 그것이 가능한 일인지요?

청년은 불안한 마음으로 강연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강연자가 불쾌하게 생각한 나머지 혹시라도 강연을 망칠까 두려워 질문서를 쓴 것을 반쯤은 후회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많은 청중들이 실망하는 사태가 오지 않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그가 성급히 질문서를 디밀은 것은 그의 열정 때문이었다. 그의 성격 탓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명망을 얻고 있는 민족 지도자가 올바른 독립 노선을 가져 주기를 진심으로 원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사태는 그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번졌다. 질문서를 받아 읽은 안창호는 손짓으로 사회자를 불렀다.

“대관절 이 사람이 누구인가?”

사회자는 어쩔 줄 모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안창호는 고개를 숙이고 질문서를 다시 읽었다. 강연회장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안창호가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받았는데 좀더 연구해 봐야 할 어려운 것이라서 답변은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안창호는 황망히 인사말을 하더니 강연을 끝내 버렸다.
그 날 청중들은, “도산 선생이 왜 갑자기 주접이 들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강연장을 빠져 나갔다.
이것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실화이다.

그 쪽지 질문을 한 사람이 바로 만주일대에서 활약한 진짜 김일성이었답니다.
대단한 청년이었대요.
만주, 연해주, 외몽골, 한반도 북부지역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불렸으니..
그 정도 배포가 있었으니 정권을 잡았겠고..

치세
2008-02-07 22:54:18
917 번 읽음
  총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행복한 바보 곰 '08.2.13 8:58 PM 신고
    ㅋㅋㅋ 이글 쓰신 치세님 아직도 국보법이 존재하는데 이런 글을 올리시다니 담력이 대단하십니다.^^;
    ...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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