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게시물을 올릴수있는 게시판입니다.
  • 유년추억
  • 학교생활
  • 입시준비
  • 대학생활
  • 군생활
  • 알바생활
  • 취업준비
  • 직장생활
  • 원룸생활
  • 연애중
  • 결혼준비
  • 집안살림
  • 자녀교육
  • 창업준비
  • 이민유학
  • 노후생활
  • 전체보기


남자들이면 한번쯤 꿈꿔본 로망

 

2008년이 사망한지 35주년이 되는해였다.

영화배우 이소룡의 사망일은 1973년 7월 20일 입니다.
생년월일 : 1940년 11월 27일

이소룡의 프로필이나 한번 올려볼게여^^

¤본명: 이진번, Bruce Lee

¤예명: 이소룡

¤성좌: 사수좌

¤신장: 171cm, 63.5kg

¤출생지: 미국 샌프란 시스코의 중국인 병원

¤부모: 이해천(광동성 출신- 광동지방의 연극의 일종인 엔극 배우. 64세의 나이로 별세), 하금상(그레이스 리, 절강성 출신-미국거주)
¤형제: 3남 2녀중 넷째. 아그네스(누이), 이충담(형. 1939년생, 영어명 피터 리, 홍콩 천문대에서 근무), 이진휘(남동생. 1942년생, 영어명 로버트리, 미국에서 거주하는 직업은 가수)

¤어렸을 때 장래희망: 의사

¤고등학교: 195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혼자 건너가 에디슨 직업고등학교에 다님

¤대학: 1962년 씨에틀의 워싱턴 주립대학 철학과 입학, 심리학 전공- 중퇴

¤결혼: 1964년 1월, 씨애틀 시의 프로 테스던트 교회

¤부인: 린다 에미리(Linda Emery)

¤장남: 이국호(브랜든 리- Brandon Lee, 1965년생)

¤장녀: 이향응(샤논 리- Shannon Lee, 1969년생)

¤특기: 댄스(차차차), 1958년 홍콩 '차차차' 경연대회에서 우승

¤취미: 드라이브. 빨간색 포르세 메르세데스 350OSL을 타고 스피드를 즐겼고, 죽기전에는 롤스로이스를 주문했었으나 이 차는 타보지 못했다.

¤자주 쓰는 말: Good(好- 하오) , Walk on!

¤좋아하는 노래: And When I Die

¤좋아하는 음식: 김밥

¤애인: 페티 텐페이(정패)

¤스승: 엽문, 황순양

¤운동경력: 13살때부터 쿵후를 배웠고, 태극권(아버지에게서 수련), 북소림 권법(북소림의 슈혼성씨에게서 수련), 영춘권(남소림의 대가 엽문 선생에게서 수련), 태권도(한국 태권도 사범 이준구에게서 수련), 마장/눈처크/쌍절봉(필리핀 봉술의 일인자 대니 이노샌트에게서 수련), 기타 공수도등을 수련하였다.

¤절권도 창시: 1967년 세계적인 무도잡지 블랙벨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초로 공개

¤유명제자: 스트븐 매퀸, 리 마빈, 제임스 코반, 제임스 가너, 스타링 씨리휜트, 류이스 알신더(카림 압둘 자바), 척 노리스

¤도장을 열었던 장소: 씨에틀→오클랜드→LA차이나 타운 및 대학시절 교정

¤친했던 사람들: 제임스 코반(영화배우), 이준구(미국 최초의 태권도 보급인), 기무라 다까유끼(미국시절에 만났던 일본인 2세), 소기린(9살때부터 친구- 영화인), 레이몬드 쵸(골든 하비스트 사장), 대니 이노샌트(필리핀 무술인). 정패(홍콩 영화배우- 이소룡의 죽음과 관련된 의문의 여배우), 마리아 리, 묘가수

¤사망일: 1973년 7월 20일 23시 30분(32세)

¤사망원인: 뇌부종 등 여러 가지.

¤장례식때 들려준 노래: And When I Die, My way, 인포지블, Dream, Look Around

------------------------------자료출처, www.dradonstory.org

요즘 갑자기 이소룡 같은 20세기 중반의 풍운아들에 관한 글들이 자주 올라오는군요. 뭐 이곳 격토방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무술 관련 커뮤니티에서 이소룡에 관련된 글은 거의 정기적으로 이슈화되고 있습니다. 잊어버릴 만하면 한 번씩 반짝 이슈가 됐다가 사라지곤 하죠. 제법 고개가 끄덕여질만한 근거를 갖춘 의견부터 어린아이들 장난 같은 판타지 소설까지 글의 내용들이 가지각색이지만 그 큰 갈래는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지나친 미화, 혹은 지나친 폄하입니다. 일반적인 패턴은 이렇습니다. 누군가가 지금의 강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이소룡 앞에서는 어린아이일 뿐이고 이소룡은 마치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처럼 심하게, 아주 심하게 미화합니다. 덤으로 이소룡이 성실함과 겸손함을 갖춘 대단한 인격자였으며 그의 몸이야말로 모든 신체 중에서도 최상의 격투용 신체라는 의견도 반드시 추가시켜 용비어천가를 부릅니다. 그러면 바로 비난이 이어집니다. 이소룡은 실은 별것도 아닌 영화배우일 뿐이며 이소룡 정도는 나도 이길 수 있다. oo를 만나면 바로 발린다. 초딩이냐. 이런 식으로 이소룡을 ‘동네 굶고 사는 말라깽이 형’ 정도로 한참 폄하해버리죠. 그러다보면 과거의 인물들에 대한 평가, 격투기에 적합한 신체 등에 관한 여러 가지 논의가 오고 갑니다.(사실은 욕설이 훨씬 많이 오고갑니다.) 이러한 현상은 보통 한 2~3일 정도 진행되다가 ‘이소룡교’의 광신도, 혹은 이단 중 누군가가 흥미를 잃어버리면 잠시 휴전상태로 접어듭니다. 어차피 이소룡이 무덤에서 튀어나와 괴조음을 내지르며 효도르와 한 판 붙어볼 확률은 복제인간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0%이기 때문에 이 논란은 결코 누군가의 승리 혹은 패배로 끝나는 법이 없이 서로 욕설만 주고받다가 한 쪽에� 때려치우면 평화가 찾아오는 거죠.

그러나 이 아슬아슬한 평화는 다음번에 또 누군가가 이소룡에 관한 용비어천가를 부르기 전까지만 계속됩니다. 다음번에도 분명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이소룡 최강설’은 어느 날 문득 뜬금없이 불거질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이소룡은 ‘투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말라깽이 영화배우’도 아니라고 봅니다. 둘 다 그저 논쟁도중에 감정이 격화되어 극단적으로 표현된 이소룡의 왜곡된 모습이라는 것이죠.

 

하여, 오늘은 이소룡에 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들에 대하여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물론 고인에 관한 이야기라 100% 검증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 글은 항상 그렇다시피, 최소한 공인된 출판사나 언론사를 통해 걸러진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근거는 갖춘 것들이니 참고하시면 ‘인간’ 이소룡을 이해하시는데 조금쯤은 더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1. 이소룡은 무술 실력에 걸 맞는 인격자였다?

이소룡을 미화하시는 분들이 주로 사용하는 패턴 중에는 ‘항상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겸손했으며 모두에게 친절했다.’라는 식의 이소룡의 성품에 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소룡의 끝없는 수련은 ‘집요함’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성실함’과는 조금 다른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성실함’이라면 인생 전반에 걸쳐 매사에 발휘되는 성품이어야 설명이 되겠죠. 그러나 이소룡은 자신이 원하는 분야 즉 무술, 영화, 연예 등에서만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집요했습니다. 어린 시절 이소룡은 3살 연상의 죽마고우 소기린(유니콘 찬)과의 레슬링이나 대나무 칼싸움장난에서 번번이 밀렸습니다. 어린 시절 3살 차이란 어마어마한 것 이니까요. 그러나 결코 이소룡은 졌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소기린이 질려서 기권하기 전까지 덤벼들었다고 합니다. 또한 장성하여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여자를 꼬시기 위해서라는 별 볼일 없는 이유로 차차차를 배웠던 이소룡은 단순히 2등이 싫다는 이유로 필요이상의 맹연습을 하여 1958년 차차차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자신이 흥미로운 분야에서의 집중력과 승부근성은 엄청났습니다.

 

그러나 학업이나 그 밖의 업무에서 그는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죠. 이소룡의 모친 그레이스 리 (하금당)는 인터뷰를 통해 ‘아들이 학교를 오지 않았다는 연락을 자주 받았다. 타일러도 보고 꾸짖어도 봤지만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이소룡은 기존에 다니던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여 다들 알고 계시는 ‘성 프랜시스 자비에 학교’에 가게 된 겁니다. 또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대단히 호전적인 소년이었습니다. 최근 영화의 개봉으로 유명세를 탄 이소룡의 사부 ‘엽문’의 아들 엽준은 이소룡에 대한 첫 인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싸움에 환장한 놈이었다.”

최초 무술 수련의 목적도 싸움에서 강해지기 위함이었고 그 당시 이소룡은 친구들과 ‘호랑이파’라는 폭력조직(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고 요즘의 ‘일진회’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미 그때 그는 제법 명성 있는 아역배우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비록 힘없는 아이들을 괴롭히지는 않았다고 하지만(이 부분도 상당히 미화되었을지 모른다는 혐의가 진합니다. 이소룡은 인터뷰를 통해 학창시절 숙제는 모두 급우들이 대신 해주었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는데 그게 과연 친구들의 순수한 호의 때문일까요?) 힘 있는 애들과는 끊임없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웠다고 하니, 어린 시절의 소룡은 그다지 성품이 올바른 아이였다고 보기 힘듭니다.

호랑이파 ‘양백천’의 증언: 이소룡은 시도 때도 없이 싸웠다. 일대다수로 싸우는 것도 전혀 꺼리지 않고 싸우고 싸웠다.

친동생 '아그네스 리'의 증언: 오빠는 정말로 자주 싸웠다. 행여나 지고 오는 날이면 분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보통 이런 아이들의 경우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품이 착해지는 것이 전형적인 드라마의 양상이지만 이소룡은 현실이지 드라마가 아니었습니다. 엽문으로부터 영춘권을 전수받은 이후 이소룡은 더욱 열심히 싸웠습니다. 보통 이럴 경우 드라마에서는 수염이 성성한 노사부가 엄하게 꾸짖기 마련이지만 이 엽문이라는 사람도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도장에서만 수련하지 말고 영춘권의 강함을 거리에서 시험해보라.’ 참 쿨한 사부님이죠. 그 외에도 엽문의 남다른 일화는 따로 글을 하나 써야 할 정도로 많습니다. 서양인과는 결코 사진을 찍는 법이 없다거나, 전혀 거리낌 없이 아편을 빨아댄다거나...아무튼 엽문에 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따로 언급하도록 하죠.

어쨌든 이소룡의 유.소년기는 이렇듯 질풍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면 이 급하고 호전적인 성격이 나이 먹고는 고쳐졌을까요? 정답은 ‘절대로 아니올시다’입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에도 이소룡의 이런 성격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미국생활 초창기 이소룡을 돌보았던 초씨 부부의 증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좋게 말해주지 않을 바에야 아무 말도 안하는 편이 낫겠죠. 그래도 물으시니 대답하겠습니다. 그는 난폭하고 버르장머리 없고 존경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나는 무술한다는 사람 안 믿어요. - 루비 초

이미 대스타가 된 이후 기자들이 이소룡의 과거에 대하여 질문 했을 때의 답변입니다. 인지상정이 보통 저런 때는 말이라도 달짝지근하게 발라주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런 혹평을 퍼부은 것을 보면 아마 이소룡은 미국생활 중에도 성질을 못 죽였던 것 같습니다. 홍콩에서는 잘나가는 부잣집 자식에 (이소룡의 부친 이해천은 제법 잘나가는 배우였으며 집도 여러 채 가진 부자였습니다.) 무려 23편의 영화에 출연한 스타급 아역배우였던 자신이 미국에서는 웨이터나 해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어쩌면 더 성질이 더러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그의 불같은 성격은 이후 그가 유명한 무술가가 된 이후에도, 아니 그가 사망할 때까지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소룡의 쿵푸가 상당히 유명세를 떨치게 되자 그는 제자들과 함께 tv쇼에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시애틀 킹카운티’라는 지방방송국이었는데 거기서 이소룡은 제자 제시 글루버에게 안면에 럭키펀치를 허용하고 맙니다. 거기에 갑자기 엄청나게 흥분한 이소룡은 자신의 제자 제시 글루버를 말 그대로 ‘아작’을 내버립니다.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지요. 제시 글루버 사건 이외에도 이소룡의 다혈질 성격을 보여주는 예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경찰을 공격하려 했는데 막역한 친구 타키 키무라의 제지로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거나 ‘에디와 말더듬 사건’ 같은 경우가 그 예이죠.

영화를 통해 대스타가 된 이후 “엑스트라 역할의 동네 건달들이 ‘이소룡을 이긴 남자’라는 명성을 좇아 여러 차례 도전을 했지만 모두 조용히 거절했다.” 라는 일화는 이소룡이 정신적으로 성숙한 증거라기보다는 공인, 그것도 대단히 유명한 공인이라는 이소룡의 입장에서 비롯된 행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와 오래도록 상종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최소한 한 번은 그의 ‘불같은 성격’에 대하여 언급하니까요.

또한 많은 이소룡교 교도들이 인용하는 절권도 책에서 그가 언급한 정신적 측면에 관한 글들에 대해서도 몇 줄 적겠습니다. 이소룡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격투의 대단히 심오하고 철학적인 부분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의 이소룡은 자신의 가르침을 정작 자신이 잘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지했으며 그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하기도 했습니다.

 

2. 이소룡은 그저 영화배우일 뿐, 격투가가 아니다?

이건 해석하기 나름일 듯합니다. 이소룡이 영화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은 그가 태어나고 단 3개월만이었습니다. 연예인이었던 부친의 영향으로 ‘금문녀’라는 작품에서 신생아로 등장한 것이 그의 영화 데뷔였죠. 데뷔라고도 민망한, 소품이라고 봐도 하등에 문제가 없을 그런 출연을 제외하고 정식적으로 아역배우에 데뷔한 것은 그가 6세 때입니다.

6세에 그는 ‘인지초’라는 작품에서 유니콘 찬을 괴롭히는 구두닦이 소년으로 출연합니다. 당연히 그다지 비중이 높은 역은 아니었죠. 그리고 같은 해에 ‘세로상’에 출연하는데 이때 처음으로 본명 ‘이진번’이 아닌 ‘이소룡’이라는 예명을 사용했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총 23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아역 마지막 작품인 ‘인해고홍’에서는 첫 단독 주연을 맡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소룡 주연의 영화 그러면 ‘당산대형’ ‘맹룡과강’ ‘정무문’ ‘용쟁호투’ ‘사망유희’만을 꼽는데 정확히 하자면 ‘인해고홍’을 추가해야 하는 것이죠. 아역시절부터 이소룡은 엄지손가락으로 코 훔치기, 옷소매를 아래로 탁탁 털어 내리기 등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액션을 선보였다고 합니다. ]

이렇듯 이소룡은 많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아까도 언급했다시피 ‘싸움’ 역시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얼굴이 팔린 아역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의 불량학생 블랙리스트에 끼어있었다 합니다.) 1959년 도미 이후에는 당분간 철저히 무술인답게 살아갑니다. 많은 대결을 하고, 끊임없이 수련을 하는 등 그의 모습은 정확히 ‘무도가’ 그것 이었습니다. 실제로 여러 유파의 여러 사람들과 겨뤘으며 또 대부분 승리했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최초로 한 싸움은 미 공군 출신이자 군소 복싱단체에서 헤비급 챔피언을 지낸 제임스 드밀 과의 대결인데 초살로 끝냈다고 합니다. 이후 드밀은 군말없이 이소룡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거짓은 아닌 듯 합니다. 이소룡이 사망한지 오래된 오늘날까지도 ‘나는 이소룡과 대결해서 승리했다’라고 자신 있게 밝히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소룡은 거의 패배하지 않았거나 패배했다면 정말로 사리사욕에는 관심없는 은둔고수에게 패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소룡이 죽어버린 지금은 무엇이 100%의 진실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것은 1966년 우연한 기회에 ‘그린 호넷’에 출연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인 제자들 덕분에 가끔 동양인 무술가 역으로 우정출연 하여 용돈 정도나 벌던 그가 본격적으로 미국인들에게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이 바로 그린 호넷입니다. 작품에서 그는 주인공 그린 호넷의 조수 ‘카토’ 역할을 연기했었는데 워낙 무술 솜씨가 뛰어나 주인공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여담입니다만 ‘그린 호넷’이 완결되고 방송될 ‘배트맨과 로빈’의 흥행을 위해 본래는 그린 호넷 마지막 편에서 그린 호넷&가토 vs 배트맨&로빈의 대결을 보일 예정이었지만 이소룡의 민첩한 몸놀림을 도저히 배트맨과 로빈 역할의 배우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그냥 두 팀이 연합하여 하나의 사건을 해결하는 에피소드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미국에서도 제법 성공을 거둔 이소룡은 홍콩으로 돌아온 후 영화 사업에 매진하다가 다들 알다시피 의문사를 당하죠. 즉 장성한 이후 그가 영화 사업에 본격적으로 매진 한 것은 1971년부터 1973년까지 3년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영화배우로서 활동 할 당시에도 남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끊임없이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그는 분명히 엔터테인먼트 미디어를 통해 자주 노출된 인물이긴 합니다만 완전한 ‘영화배우’만으로 매도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합니다. 그가 창안한 절권도가 여전히 많은 수련생을 거느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무술인 으로서도 상당한 업적을 남겼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이소룡처럼 화려하기만 한 동작은 실전에서는 아무 쓸모없다?

이소룡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화려한 모습은 ‘무도가’ 이소룡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그는 특유의 괴조음을 내지르며 북파 소림권에서 유래한 화려한 기술들을 뽐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객을 위한 무술이었습니다.

실제 대결에 임하여 화려한 북파 소림권이 아닌 자신의 주특기를 사용하는 이소룡은 괴조음도 지르지 않았고 절대 화려한 기술을 사용하는 법도 없었다고 합니다. 철저하고 잔혹하게 상대를 파괴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영상이 남아있지 않으니 확인할 바는 없습니다. 혹 이소룡의 실전 영상이라는 낚시 영상이 나돌더라도 속지 마십시오. 그의 대련 영상은 있을지언정 실전 영상은 오늘날 확실히 남아있지 않습니다. ‘용쟁호투’ 촬영 당시 촬영기사 헨리 웡이 16mm 필름 다섯 시간 정도 분량을 따로 촬영해 두었다고 합니다. 바로 ‘용쟁호투’의 홍보 다큐멘터리 영상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그 필름 안에 이소룡이 진짜로 도전을 받아 대결을 펼치는 영상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소룡의 실제 싸움 실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필름은 10분간의 홍보 영상이 제작된 이후 폐기 되었다고 하니 우리는 영원히 그가 어떻게 싸웠는지를 지인들의 말로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와의 대결에서 크게 당한 이후 친분을 쌓은 댄 이노산토의 말을 인용해보면 이소룡은 모든 형식의 격투에 다 능숙했다고 합니다. 발로만 싸우다가도 갑자기 복싱스텝을 밟기도 했고, 상대와 뒤엉켜 주짓수 대결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실제로 상당히 강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사망한지 50년도 채 되지 않은 인간에 대한 일화가 모조리 사기일 가능성은 낮기 때문입니다. 체급차이가 심한 상대를 순식간에 제압했다거나 일대 다수로 싸워서 승리했다는 등 그의 일화는 절반만 진실이라고 해도 충분히 평범한 액션배우 이상의 강함을 인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그가 세계 최강이었다는 것 역시 전혀 검증이 안됐습니다. 그는 당시의 최강급 선수와 겨뤄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하마드 알리나 조지 포먼과 같은 당시의 기라성같은 스타들과 실전을 겨뤄 본 적이 없으며 그가 헤비급 복서를 해치웠다는 것은 사실은 사실이지만 그 수준이 심하게 떨어졌기 때문이죠. 이소룡이 해치운 헤비급 복서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제임스 드밀인데, 제임스 드밀은 당시 ‘캐피톨 힐’이라는 삼류 폭력조직을 이끌고 있을 만큼 엉망진창인 몸상태였습니다. 알리와 포먼, 조 프레이져 등이 버티고 있던 '황금시기'에 드밀이  결코 헤비급 복서를 대표할 수는 없죠.

또 많이 와전되고 미화된 부분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어린 시절 이소룡이 복싱대회에서 우승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사실은 사실이지만 그 복싱대회는 복싱대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조그마한 대회였고 (홍콩 12개 고교가 참가하는 복싱챔피언 대회였습니다.) 상대들 역시 아마추어였죠. 이소룡이 결승전에서 만나 3라운드에 케이오 시킨 게리 엘름스만이 그나마 상대다운 상대였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이소룡은 상당한 실력을 갖추었고 실전에서의 경쟁력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초일류들과의 대결 기회는 없어서 그의 진짜 수준은 가늠할 방도가 없다. 그의 실전에 관련한 영상 자료도 없기 때문에 정확한 예측 또한 어렵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4. 이소룡의 몸이야말로 모든 파이터들의 이상형에 가까운 몸이다?

예전 글에서도 밝혔다시피 격투기는 그 역사가 너무 오래되어 수련과 단련의 방법이 천차만별입니다. 하나의 최선의 수련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최선의 신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죠. 아오키 신야 체형부터 부터 밥 샙 체형까지 싸우는 법도 가지가지, 단련법도 가지가지인 현 mma구도에서 무슨무슨 체형이 최고다 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봅니다.(자세한 것은 많은 분들이 설명하셨고, 저또한 이전글에서 충분히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이소룡의 간고등어 몸매도 이소룡이 완전히 만들었다기보다 선천적인 면도 상당히 있습니다. 이소룡이 태어났을 때 모친 그레이스 리가 처음으로 지어준 이름이 ‘이세봉’ 이었습니다. 아이가 너무 마르고 빈약하였기 때문이죠. (중국에는 약한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여자아이 이름을 지어줘야 화를 면한다는 미신이 있습니다.) 이후에 금방 ‘이진번’으로 바꾸긴 했지만 그 에피소드를 통해 이소룡이 본래 대단히 마른 체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소룡의 간고등어 근육체형은 그것만이 최고라서가 아니라 이소룡이 자신의 선천적 몸을 가장 효과적으로 발전시킨 형태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소룡에 관련된 몇 가지 의문에 대하여 나름대로 근거 있는 해답을 찾아보았습니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오늘도 그만 길어졌네요. 좀 더 쓸거리도 많고 재밌는 에피소드도 상당히 남았지만 이쯤만 쓰겠습니다. 손가락이 아파서요. 허허허. 거듭 말씀드리지만 무성한 소문과 전설을 남기고 간 고인에 관하여 100% 확실한 사실만으로 글을 쓸 방법은 저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수많은 관련 자료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려고 대단히 노력했음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소룡은 확실히 20세기 중반 무술계의 거인이었습니다. 꼭 세계에서 최강이어야, 무적불패여야만 거인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충분히 그는 무술가로서, 영화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런 그를 사실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미화하면 오히려 그를 곡해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고, 평생을 열심히 살아간 인물을 함부로 폄하하는 것도 예의 없는 행동이죠.

이소룡. 그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이제는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는 사나이(대인배)였다는 것입니다.

출처: http://bbs.sports.media.daum.net/gaia/do/sports/bbs/group2/mma/read?bbsId=F006&articleId=29834

 




2009-07-24 15:23:30
943 번 읽음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캐시선물





365ch.com 128bit Valid HTML 4.01 Transitional and Valid CSS!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