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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민사관.] '근대 조선' 발목 잡은 대보단(大報壇)을 아시나요

 
김충현| 07.13 15:25 추천 8 반대 1
전형적인 식민사관에 입각한 기사입니다.
대보단은 기사의 언급처럼 명나라 황제를 위한 제사를 지내던 공간입니다. 그렇지만 그 공간이 왜 이미 망해 없어진 이후, '오랑캐' 청이 중원을 차지한 이후에 마련됐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사대주의'로 설명하면 안됩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깊은 자괴감에 빠집니다. 임금은 오랑캐에게 고개를 숙여 항복하고 국본인 세자와 왕자는 오랑캐의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명나라가 망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는 청나라가 마련했던 국제질서에 편입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조선 스스로 정체성을 다시 정립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조선중화주의입니다. 중화라는 단어에 너무 민감히 반응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문명이라는 의미는 이 당시까지는 중화라고 표현됩니다. 문명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번역되어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서 중화라는 단어의 의미는 지금의 문명으로 보시면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조선중화주의는 명나라가 망해버려 문명국은 조선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식입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같은 문명국이었던 명나라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탄생된 조선중화주의는 이후 숙종-경종-영조-정조로 이어지는 시간동안 찬란한 문화를 꽃피울수 있게하는 계기가 됩니다.

기자가 쓴 내용은 전형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조선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드러냈던 논지를 그대로 끌어온것입니다. 즉 이 기사 자체가 식민사관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습니다.역사를 판단하는데 가장 중요한건 현재의 시각이 아니라 그 당시의 관점에서 현상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단선적으로 현상을 파악하면 오류가 발생하게 됩니다. 또한 이런 기사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선 시민들 스스로 공부를 해야합니다.

댓글의 댓글 1
* 김성현
이걸 읽어보니 그냥 더 괘씸해지는군요....이거 더 나가면 친일행적에 정당성까지 씌우겠습니다...... 07.13 15:29
 
"임진왜란때 도와준 明에 감사" 1705년 숙종부터 머리 조아려개혁 군주 정조도 매년 찾아… 대한제국 세우며 환구단으로

1894 년 5월 조선은 풍전등화였다. 일본의 침탈과 서구 열강들의 각축으로 나라의 지경은 더없이 위태로웠다. 그 무렵 어느 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창덕궁 후원으로 향했다. 아홉 계단 위 제단에는 중국 황제의 신위(神位)가 적힌 황색 지방(紙榜)이 있었다. 대보단(大報壇). 명나라 황제의 '큰 은혜를 갚는다'는 뜻의 제단이다. 쇠락하던 조선의 국왕은 왜 사라진 제국의 혼령에게 머리를 조아렸을까? 이 대보단의 숨은 뜻을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풀어낸 연구 결과가 나왔다. 계승범 서강대 대우교수는 신간 '정지된 시간'(서강대출판부)에서, 조선 후기 200년간 이어진 대보단 제례는 당대 엘리트층의 뿌리 깊은 존명의리(尊明義理) 사상을 담고 있었으며, 이것이 조선으로 하여금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한 '의식의 족쇄'였다고 주장했다.

◆통치이념의 위기 타개책

대 보단은 1705년 숙종 때 처음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구해준 명(明)나라 만력제의 은덕을 기린다는 취지였다. 첫 제례에서 숙종은 직접 술을 올리고 음복했다. 당시 조선은 삼전도 항복(1637·청 태종에 패한 후의 굴욕적인 항복) 이후 정신적 혼돈에 빠져 있었다. '오랑캐의 나라' 청이 명을 무너뜨리고 새 책봉국이 되었지만 조선 지배층의 의식 속엔 여전히 명이 '아버지의 나라'였다. 유교 질서의 종주국이 사라지면서 조선의 지배 질서마저 흔들릴 참이었다. 목소리만 높았던 북벌론도 기세가 꺾이자, 왕실로서는 존명의리의 이데올로기를 복구할 '상징'이 필요했다. 숙종은 대보단 제례를 주창하면서 '명과의 특별한 군부·신자 관계와 임란 때 나라를 살려준 재조(再造)의 은혜'를 강조했다.

대보단은 후대로 가면서 더 강화됐다. 영조는 홍무제와 숭정제를 제례 대상에 추가했다. 명을 세운 홍무제는 조선의 창업을 승인하고 국호를 정해준 대조(大造)의 은혜를 베푼 왕으로, 숭정제는 조선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원군을 보내준 왕으로 추대됐다. 이 세 황제의 기일마다 제례를 행하도록 규정까지 내렸다. 명이 망하면서 끊어진 삼황(三皇)에 대한 제사가 조선에서 이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됐다.

◆정조도 "황제 은혜 못 잊어"

' 계몽군주' 정조도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주년이 되던 해 제례 후 정조는 이렇게 전교했다. "오늘은 바로 동방이 다시 지음을 받은 날이다. 아! (명나라) 황제의 은혜는 잊을 수가 없다." 정조의 친행(제례에 직접 행차) 비율은 24년 재위기간 중 23년(96%)으로 역대 최고였다. 정조는 서울의 유생과 무인에게도 제례 참석을 의무화해 불참자는 한시적으로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하고 관직에 있는 자는 벌을 주었다.

나라가 기울던 고종에 와서도 제례는 계속됐다. 서양 열강들과의 수교가 이어지던 1882~86년 고종의 대보단 친행은 더 잦았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점령하기 한 달여 전까지도 홍무제 기일 제사를 지냈다. 대보단 제례는 갑오개혁(1894~1895)에 와서야 중단됐다.

◆중화의식 집착…세계질서 못 봐

존명의리의 자취는 조선의 '자주독립' 후에도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1897년 10월 고종이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환구단(桓丘壇·천자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단)을 세우고 천제(天祭)를 지낼 때, 그 근거는 "중화문명의 정통이 명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독립문을 세운 것과 같은 논리이다. 계승범 교수는 대보단의 질긴 생명력을 조선 사회가 딛고 있던 이데올로기 체계에서 찾는다. 통상 국가의 권위가 무력과 이념에서 나온다고 가정할 때, 조선은 특히 문(文·이념)을 앞세우며 명에 대한 사대를 국시(國是)로 천명했다. 역대 왕들은 명 황제로부터 책봉받은 제후임을 강조했다. 강력한 친위대를 갖지 못한 국왕으로서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존명의리의 가치를 솔선수범하고 제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가 대보단이었다는 것이다. 유교적 질서가 기울던 19세기에도 조선 주류 지배층은 독자적 권위체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중화를 더욱 내면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그럼으로써 '오랑캐에 더럽혀진 전도된' 국제 현실에 굴하지 않고 문화적 정체성을 간직한 채 국난을 극복하고 통치 질서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저자는 "대보단은 단기적으로 왕조 통치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주변국들의 국력·정세 변화를 조선이 따라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고 썼다. 명나라의 정신적 유산에 사로잡혀 '근대의 문턱'을 넘지 못한 조선의 운명에는 '대보단'이란 또 다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전병근 기자 bkjeon@chosun.com
조선일보 기사전송 2011-07-13 03:27 최종수정 2011-07-13 11:24
출처) //news.nate.com/view/20110713n01379
 //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12/2011071202504.html
네이트닷컴, 조선일보

진성화| 07.13 14:39 추천 3
유교 자체의 문제라기보단 성리학 교조주의가 조선을 말아 먹었지.... 원래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유불도의 조화로 문화를 이루었는데 조선에서부터 그 균형이 심각하게 깨졌다. 원래는 성리학도 처음에는 진보적인 급진사상이었고 조선 초기의 훈구파들은 꽤나 진취적인 사고방식으로 국방 과학기술 상업교류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지만 중기 이후 사림이 집권하면서부터는 마치 현대의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처럼 형이상학적 예술적 철학을 무리하게 정치와 행정의 영역에 끌어들여 통치하다 보니 나라가 개판난거다

김성호| 07.13 14:12 추천 3 반대 1
지금은 미국의쫄개가 되어서 미국 하면 꺼벅 죽지. 우리는 남한테 기대지 않으면 살수없나봐.
세계 어디를 봐도 작전권을 외국에게 맡겨야 한다는 나라는 단 한나라도 못봤다.
오죽하면 후세인 내쫓은 이라크도 자기들이 작전권 가지고 있다.

김민수| 07.13 14:02 반대 2
이야 나당연합을 주도한 삶과 이성계는 그 당시 민중의 영웅이였을텐데 몇 백년이 지나니까 역적취급받는구나.. 몇 백년이 더 지나면 이완용이 구국의 영웅이 되고 유관순이 역적되는 세상이 올수도..

김경중| 07.13 11:29 추천 2
강대국을 이용하는 외교를 하기 위한 조아림이 아닌 이미 수백년전에 사라진 나라에 대한 국가의 머리들이 행한 일이기에 안타까운 일이지. 외교에 있어서 열강의 힘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오로지 기득권층이 기득권을 빼앗길가 두려워 저지른 근대의 우리 역사 속의 폐단들은 지금도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새기고 늘 지각하고 있어야 한다.

김성현| 07.13 10:36 추천 16 반대 7
그래서.... 친일언론이 중화사대를 비판한다?
푸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ㅤㅎㅔㅎ헤헤헤헤헤헤헤헤헤헤~!!!!!!!!!!!!
나 10분만 좀 웃을게.

치세
2011-07-13 16:43:42
1086 번 읽음
  총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사이뇨 '11.9.16 12:14 AM 신고
    조선의 소중화 사상
    원래 유교는 종교라고 보기엔 뭔가 아닌 것 같은데,
    조선에서는 거의 국교처럼 받들다보니
    이런 사대주의가 좀먹고 있었죠.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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