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라시드 MS 연구소장의 ‘미래 기술 4대 조류’ 분석
어느 사회에나 ‘미래’를 먼저 감지하고 실험하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른바 ‘알파 기크(alpha geek)’이다. 이들은 남보다 몇 년 앞선 삶을 산다. 이들은 겨우 그 씨앗만을 보여주기 시작한 신기술·신제품·신조류에 주목하고, 그 잠재적 가능성에 열광한다.
릭 라시드는 그 ‘알파 기크’ 중에서도 첫손꼽히는 ‘기술 선지자’라고 할 만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전문성뿐 아니라 세계 컴퓨터업계를 쥐락펴락하는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의 수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더욱 주목된다.
지난 5월13일부터 16일까지 컴퓨터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출판사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는 오라일리 네트워크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터클라라에서 주최한 ‘신기술 컨퍼런스(Emerging Technology Conference)’에서 릭 라시드가 발표한 ‘미래의 기술 조류’를 정리·분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신제품을 발표하는 빌 게이츠.
컴퓨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저장 용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저장 용량의 증가 추세는 ‘무어의 법칙’을 능가한다”라고 라시드 소장은 말한다. 무어의 법칙은 컴퓨터 프로세서의 처리 속도가 18개월마다 2배로 빨라진다는 이론이다. 그만큼 컴퓨터 관련 기술의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상징으로 널리 인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장 용량의 증가세는 이 법칙을 무색하게 한다. 6개월마다 2배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디스크 한 장에 ‘평생의 삶’ 저장
1.44MB(메가바이트) 용량의 플로피디스크가 사실상 ‘멸종’하고 100MB, 250MB, 심지어 1GB(기가바이트) 용량의 휴대용 디스크가 널리 이용되는 것, 일반 PC의 하드디스크 용량이 MB 단위를 넘어 GB(1GB= 1024MB), 심지어 TB(테라바이트, 1TB=1024GB)로 넘어가는 현실은 이 현기증 나는 증가 추세를 잘 반영한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눈 모든 대화를 1TB 용량의 디스크 한 장에 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라고 또 다른 컴퓨터 전문가인 리차드 코먼 씨는 말한다.
컴퓨터와 사람 사이의 인터페이스가 매우 다양해진다. 인터페이스는 일종의 접속 장치, 혹은 중개 장치다. 출입문의 경우라면 문의 손잡이가, 컴퓨터의 경우라면 키보드나 터치스크린이 인터페이스다. IBM·마이크로소프트 등은 일반 필기체를 인식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개발하고 있다. 지금도 몇몇 개인 휴대용 단말기(PDA)들이 펜 인식 시스템을 쓰고 있지만 정확도가 아직 떨어진다.
메모장 모양의 태블릿 PC는 펜으로 스크린에 글자를 써넣기가 어려운 노트북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그 밖에도 목소리·몸짓 등을 인식하는 인터페이스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음성 인식 인터페이스 기술은 중국어 부문에서 큰 진전을 보이고 있다. “중국어는 그 발음에 맞춰 영어로 입력하면 이를 컴퓨터가 다시 중국어(한자)로 변환해 주는 복잡한 과정 때문에 여간 번거롭지 않다. 최근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중국어 음성 인식 시스템은 그 정확도와 편리성 때문에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라고 라시드 소장은 말한다.
단순히 커버를 덮었다 열었다 하는 기존 노트북 디자인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종래의 키보드 방식뿐 아니라 펜 인식·음성 인식 등 한층 다양해지고 있는 입력 방식 때문이다. 예컨대 종래의 노트북 디자인에서라면 펜으로 스크린에 글자를 써넣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사무용 메모장 또는 서판(書板) 모양의 ‘태블릿 (Tablet) PC’ 디자인은 그런 점에 착안해 나온 것이다. 삼성전자도 선보인 태블릿PC는 2001년 컴덱스에서 빌 게이츠가 그 높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크게 관심을 끌었다.
현실보다 더 실감 나는 그래픽 세계 창조
영화 의 세계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이다. 영화 에서 그 위용을 과시했던 로마의 시가지 모습도, 완성된 모양의 콜로세움도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모두 컴퓨터 안에만 존재하면서, 그래픽 기술에 의해 우리 눈에 잠시 펼쳐질 뿐인 ‘사이버’ 세계다. 이 그래픽 기술이야말로 저장 용량의 증가세에 버금갈 만큼 ‘폭주’를 거듭하는 분야이다.
플레이스테이션2(위) 같은 일반 게임기의 3차원 그래픽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요즘 나오는 플레이스테이션2·X박스 같은 일반 게임기의 3차원 그래픽 구현 기술이 1995년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 를 만들 때 쓰였던 하이엔드 컴퓨터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다. 이것은 몇 년 전만 해도 수천만 원대의 컴퓨터와 그래픽 장비를 동원해야만 가능했던 ‘실시간’ 그래픽 구현이 일반 PC 수준으로 가능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픽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함에 따라 혜택을 보는 분야는 컴퓨터 게임이나 영화만이 아니다. 유전학·단백질공학·의학 분야에도 획기적 전기를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된다. 예를 들어 한 제약회사는 특정한 세포나 질병이나 증상을 정확히 찾아내 이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특정 단백질에 부합하는 분자 조합을 찾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작업을 벌이고 있다.
PC 수천만 대 연결, 외계 데이터 분석
‘세티앳홈(SETI@Home)’ 프로젝트는 언뜻 어렵게만 들리는 ‘분산형 네트워크 컴퓨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SETI는 ‘외계 고등 생명체를 찾는다’는 의미의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를 줄인 말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큰 일은 전파 망원경으로 수신한 엄청난 양의 외계 데이터를 분석하는 일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슈퍼 컴퓨터를 동원해야만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분산형 네트워크 컴퓨팅’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세티앳홈(SETI@Home)’의 홈페이지.
당연히 천문학적 규모의 예산과 장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전세계 수천만 가정의 PC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하면서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인터넷으로 연결된 각 가정의 PC를 각각의 단말 분석기로 활용해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 가정의 PC는 이용자가 이를 사용하지 않는 시간에 마치 스크린세이버가 작동하듯이 세티앳홈으로부터 데이터를 받아 분석한 뒤 그 결과를 다시 전송한다.
딕 라시드 소장은 이같은 ‘분산형 네트워크 컴퓨팅’의 흐름이 더욱 빨라져 마침내 인터넷의 연결망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로 발전해 갈 것이라고 전망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닷넷(.NET)’이나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선원(Sun ONE)’ 같은 개념은 이러한 ‘전지구 신경망’으로 발전하는 네트워크 세상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들의 야심에 찬 포석인 셈이다.
-김영신-
kim0shin@sisapres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