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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탐구 정몽준] 中. 현대차 소유주에서 월드컵까지

 


정몽준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도중인 1979년 7월 29일 다섯살 연하의 김영명(金寧明.46)과 결혼했다.
주일.주미대사와 외무장관 등을 지낸 김동조(金東祚)의 2남4녀 중 막내딸이다.

김영명은 대부분의 학창생활을 아버지를 따라 일본과 미국에서 보냈다.

힐러리 클린턴과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등이 나온 명문 여성대학인 웨슬리대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했다.

중매는 정몽준의 넷째 형수와 김영명의 친한 언니가 섰다.

김영명은 신장이 1m70㎝가 넘는다.

"장모님이 경남여고 농구부 센터였다.

그래서 딸들이 다 키가 컸다.

약속장소에 나갔는데 키 큰 여자들이 쭉 지나가기에 미국 사람들인가 했다.

그런데 모두 나에게 오더라." MIT와 웨슬리대는 자매학교로서 차로 40여분 거리다.

이들은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틈틈이 테니스도 치는 등 1년 가량 연애 한 끝에 방학 때 잠시 귀국해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보스턴 시내의 한 아파트에 신방을 차렸다.

김영명의 첫째 언니 김영애(57)는 미국 모건 스탠리사 부사장으로 있다.

셋째 언니 김영자의 남편은 허광수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으로, 許회장의 부친 허정구는 LG그룹 공동창업주인 허준구의 맏형이다.

許회장은 2000년엔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과 사돈을 맺었다.

김영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외국에서 지내고 외교관 집안에서 성장해 남편의 성공에 상당히 기여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실력으로 정몽준의 석사 논문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감수했다.

자녀는 2남2녀.

장남 기선(20)과 장녀 남이(19)는 연세대에 다닌다.

차녀 선이(16)는 정몽준이 미국 유학 도중 낳아 현재 미국 시민권자다.

1년 전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국적을 정리해야 할 연령(만 17세)이 다가오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인 늦둥이 막내는 96년 올림픽 축구 예선이 한창일 때 가져 이름을 예선으로 지었다.

가족들은 얼마 전까지 가장의 대선 출마를 반대했다.

특히 남이는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지는 걸 무척 싫어했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면 가족사진부터 치우고 정몽준더러 "안방에 들어가 절대 나오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엔 어느 정도 양해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김영명도 "며칠 전 아버지가 들어오자 남이가 갑자기 안마를 해줬다.

우리 부부는 이를 찬성 표시로 받아들였다"고 전했다.

정몽준은 80년 6월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곧바로 현대중공업 상무이사로 승진한다.

세간에는 정몽준이 현대에 78년 처음 입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중공업 인사기록카드에 따르면 대학 졸업 직전인 75년 1월 현대그룹 공채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것으로 나와있다.

정몽준은 77년 6월 제대한 뒤 현대중공업에 배치돼 과장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78년 초 유학을 떠나 직장 초년시절은 그야말로 맛보기로 끝난다.

80년 귀국해서는 울산대에서 잠시 강사생활도 했는데 강의가 꽤 인기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몽준은 81년 아버지 정주영을 수행해 독일 바덴바덴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정주영의 통역을 맡으며 아버지가 88올림픽 서울 유치에 성공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이들 부자를 잘 아는 현대 관계자는 "정주영은 일부러 정몽준을 데리고 갔다.

떠나기 전 몽준이는 일찍부터 제대로 키워야 한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정주영이 정몽준을 국제 스포츠계에 데뷔시킨 셈이다.

이후 정몽준은 현대그룹 종합기획실을 거쳐 82년 5월 31세의 나이로 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다.

고속승진이었다.

현대중공업은 당시만 해도 국내 최대 규모의 제조업체였다.

게다가 형들도 건재했다.

정주영은 82년 5월 25일 현대 창립 35주년 기념식에서 정몽준을 사장으로 앉힌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무엇보다 본인(정몽준)이 쓴 기업경영이념이란 책을 보고 우리나라의 어떤 젊은 경영층보다 확실히 모든 것을 잘 분별해 국내에서나 국제사회에서나 잘 이끌고 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이른 감은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겁니다.

가족회의를 통해 결정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5월 25일자 현대중공업 사보) 기업경영이념은 정몽준이 MIT대 석사논문을 책으로 만든 것으로, 그가 가장 아끼는 책이다.

정몽준은 82년 1월 이 책을 출간하자마자 제일 먼저 아버지에게 들고 갔다.

정주영은 머리말만 읽은 뒤 "정말 잘썼다"며 극찬했다고 한다.

정몽준은 정주영을 가장 따랐던 아들이다.

지난해 정주영 장례식을 쭉 지켜본 현대 고위 관계자의 목격담.

"청운동 언덕에서 운구행렬이 길게 이어지는데 정몽준이 가장 서럽게 울었다.

다른 형제들과 대조적이어서 확연히 눈에 띌 정도였다.

"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정주영이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 중 정몽준이 가장 자주 찾아간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했다.

하도 자주 찾아가다 보니 정몽준의 여비서와 정주영의 남자비서가 거기서 사귀어 결혼까지 하게 됐다.

그렇다면 정주영은 정몽준에게 왜 현대중공업을 넘겨줬을까.

현대그룹 종합기획실 출신의 한 임원 얘기다.

"정주영이 건설과 자동차를 자랑스러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중공업을 더 아꼈다.

현대 임원이라면 다 아는 얘기다.

5백원짜리 지폐 한장으로 이룩한 조선업에 뿌듯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그런 중공업을 정몽준에게 넘긴 것이다.

상당한 배려를 한 것으로 봐야 한다.

" 정주영의 자서전 이땅에 태어나서에도 다른 아들은 기껏해야 한번 거론된 데 비해 정몽준은 네번 언급되고 있다.

이들 부자관계를 엿볼 수 있는 또 한가지 일화.

"한번은 정주영이 아들들과 골프를 치는데 티샷을 하고는 먼저 그냥 걸어갔다.

다른 아들들은 머뭇거리다 채를 들고 뒤따라가는데 유독 정몽준만 얼른 공을 놓고 티샷을 했다.

그러자 정주영이 저놈~하면서도 싫지 않은 표정을 짓더라."(현대 고위 관계자) 82년 사장을 맡은 정몽준은 바덴바덴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체육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울산시축구협회장, 세계양궁협회 집행위원,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 실업테니스연맹 회장, 울산시체육회 부회장 등을 잇따라 맡았다.

울산대 이사장.울산공업학원 이사장 등 교육계 명함도 갖게 된다.

83년엔 대한양궁협회 초대 회장에 오르는데, 이를 두고 당시 체육계에서는 "양궁이 유망하다고들 하니까 정주영 대한체육회장이 협회를 만들어 30대 초반의 아들을 회장에 앉혔다"는 얘기가 나왔다.

84년 전두환 대통령의 만류로 국회의원 도전의 꿈을 접어야 했던 정몽준은(정몽준의 정치 행적은 하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 85년 존스 홉킨스대로 다시 유학을 떠난다.

이홍구 전 총리 등 주위의 권고로 전공도 국제정치학으로 바꾼다.

87년 6월 박사과정을 수료한 정몽준은 그러나 93년 5월에서야 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논문 주제가 일본 자동차산업이라 일본 현지에 가보기로 하고 일단 귀국했는데 6.29 선언이 있었다.

그리곤 노동쟁의가 걷잡을 수 없이 발생해 도저히 떠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대선도 코앞에 닥쳐오고….

대선이 지난 뒤엔 주위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할 절호의 기회라며 적극 권유했다.

결국 박사논문은 평생 못쓰는 줄 알았다.

그러던 91년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너 왜 여기 있느냐며 호통을 치셨다.

무슨 뜻인지 몰라하니까 유학을 떠났으면 박사를 따와야지라며 당장 일본으로 가라고 하셨다.

이후 일본을 오가며 논문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92년 대선 때 아버지를 돕다 보니 논문은 또다시 미뤄졌다.

" 정몽준은 87년 11월 회장에 올라 90년 1월 고문으로 2선 후퇴했다.

현대중공업 경영은 80년대에 집중돼 있는 셈이다.

정몽준은 83년 사장 취임 후 첫 새해를 맞아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보다 가장 깨끗하고 성실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경영방침을 밝힌다.

젊은 사원들로 주니어 보드를 구성해 원서(原書)를 주면서 공부시키기도 하고 글로벌 매니저과정을 개설하는 등 나름대로 새로운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87년엔 작업복 등에 야광표시를 한 것도 자신의 아이디어라고 자랑한다.

80년대 현대중공업은 성장을 거듭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정몽준이 기업가로서의 능력을 검증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실권은 정주영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가 워낙 좋았고 회사도 성장할 때였다는 얘기다.

반론도 있다.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몰락한 재벌 2세가 한둘이 아니잖은가.

물론 창업이 힘들겠지만 수성(守成)도 쉽지 않다"고 옹호했다.

80년대 현대중공업의 노사갈등은 기업가 정몽준의 이미지에 흠집을 남길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중공업 회장 시절이던 89년 1백28일의 장기파업 도중 발생한 1.8, 2.21 테러사건의 후유증은 아직도 해고자 복직 문제 등과 맞물려 노사관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당시 노조 측은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농성 중이던 노조원들을 구사대가 한밤중에 각목과 식칼까지 동원해 무차별 폭행했는데 회장이 이 같은 사실을 사전에 몰랐을 리가 없다"며 정몽준의 연루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었다.

하지만 경찰은 당시 韓모 전무가 사건을 총지휘했다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했고, 파업을 주도했던 金모씨는 14년째 복직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노조의 한 간부는 "92년 대선 때 종업원 다섯명 중 두명은 현장에 없었다.

전국 각지로 흩어져 선거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두번 다시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며 정몽준 대선 출마의 후유증을 염려했다.

이에 대해 정몽준은 사원아파트를 지어주는 등 그 어떤 회사보다 종업원 복지에 앞장섰다고 주장한다.

기업경영이념에서 정몽준은 노사갈등을 부부싸움에 비유하고 있다.

"부부 간에 서로 싸운다는 것은 화합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과정이지 쌍방이 결과적으로 파국을 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떼려야 뗄 수 없는 파트너로 인식하기 때문에 부부싸움이란 것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노사관계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 이런 비유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조할 지는 미지수다.

정몽준의 업무 스타일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부하직원들을 가혹하게 다룬 사례는 많다.

"신사다운 풍모와 달리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언행은 폭군에 가깝다"는 비판이 현대와 축구협회.의원회관에 널리 퍼져 있다.

현대중공업의 한 전직 임원은 "회의 때 보고를 제대로 못하거나 답변이 시원치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박살난다.

다혈질인 데다 성격도 급해 숨쉴 틈 없이 몰아붙여 인간적으로 모욕감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85년께 현대중공업의 고위 간부가 고심 끝에 아이디어를 정몽준에게 제출했다.

정몽준은 "당신은 말이야, 화장실에 갔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내게 보고하지 마시오"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중앙고 선배인 한 간부는 업무보고를 하던 중 정몽준의 소나기 욕설을 받아야 했다.

월드컵대회 유치활동을 도운 한 외국계 회사 사장의 얘기다.

"정몽준이 해외 현지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이 일을 제대로 못한다고 때리는 것을 목격했다.

외국에서 교육을 받고 박사학위까지 가진 사람인지 의심스러웠다"고 말했다.

현대의 한 관계자는 "무조건 따르는 사람은 철저히 챙기지만, 비판적이고 쓴소리하는 사람은 완전히 배제한다.

흑백논리가 너무 분명하다.

50m나 1백m 밖에서 보면 누구나 좋아할 타입이지만 10m 안에서 잠시 같이 있으면 금방 그 정체를 알게 된다"고 말했다.

때문에 정몽준은 "주변에 브레인(brain.두뇌)은 없고 머슬(muscle.근육)만 있다"는 비난도 종종 받는다.

자발적.창의적 참모가 버티기 어렵고 결과적으로 몸으로 때우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몽준은 "일을 잘못하면 모두에게 피해가 돌아가므로 엄격함을 요구하는 게 당연하며, 이런 내 모습을 이중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했다.

잔정이 많고 인간적이었던 학창시절의 면모와는 다른 모습들이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정몽준은 한마디로 부하들을 종 부리듯 한다.

그런 자세는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운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아버지 정주영 상가에서 비서들이 조문객 중 한나라당 S의원을 민주당 소속으로 잘못 기록했다.

이를 발견한 정몽준이 "야 이 ×××야, 당장 시말서 써"라고 소리를 질렀다.

구두쇠 짠돌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돈에 대해선 엄격하다.

한 전직 비서는 "정몽준 밑에서 10여년 일한 비서가 부모의 상(喪)을 당했는데 정몽준은 상가를 찾아가지도, 부의금을 내지도 않았다"고 전했다.

친구들에게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대학동문인 한 인사의 얘기다.

"얼마 전 정몽준이 동문들을 초청해 골프를 쳤다.

운동을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캐디피는 각자 내자고 했다.

정말 얄미웠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조그만 것을 배려하지 않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 쓸 때는 썼던 아버지 정주영과 달리 정몽준은 꼭 써야 할 때에도 안 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몽준의 비서 출신인 김동대(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보)는 "안써도 될 때에는 10원을 써도 크게 질책하지만 써야 할 곳에는 흔쾌히 거금을 쾌척하곤 한다"고 반론을 폈다.

정몽준은 지금도 해외출장을 가면 팬티.양말을 직접 빨아 입는다고 한다.

양복도 몇 년째 같은 것을 입는가 하면, 구두는 한번 사면 10년도 신는다.

식당에 가도 냅킨은 꼭 한 장씩만 쓴다.

음식 남기는 것은 절대 금지다.

"먹으면 몸에 좋다"며 바닥에 떨어진 음식까지 주워먹어 주위에선 혀를 내두른다.

92년 말 대선에 출마한 아버지가 낙선하면서 좌절감을 맛본 정몽준은 93년 1월 대한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맞는다.

기업가에서 체육인, 나아가 월드컵 유치와 4강신화 창조의 일등공신으로까지 극적인 변신이 시작된 것이다.

정몽준은 취임 일성으로 "2002년 월드컵을 한국에서 열자"고 제안한다.

축구협회 원로에 따르면 "정주영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뒤 정몽준에게 너는 축구협회장을 맡아 월드컵을 한번 따와봐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만 해도 국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대선에서 자신을 공격한 정주영의 아들이 하는 일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정몽준은 개최지 결정권을 갖고 있는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에 들어가는 것으로 유치작전을 시작했다.

94~96년 월드컵 유치활동 때 정몽준을 수행했던 김동대는 "정몽준은 호랑이를 잡으려면 먼저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며 FIFA 입성에 사활을 걸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FIFA 집행위원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아시아축구연맹(AFC) 몫의 FIFA 부회장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축구계는 극히 보수적이어서 인간관계가 모든 걸 좌우하고 있었다.

따라서 축구계에 전혀 안면이 없던 정몽준이 뚫고 들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정몽준은 우선 아시아 각국을 돌며 얼굴 알리기에 나섰다.

현대그룹의 정보망과 자금력도 동원됐다.

축구계에선 괜히 선거에 나가서 창피당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94년 5월 선거에서 쿠웨이트 출신 후보를 11대 10, 한 표 차로 물리치고 승리를 거뒀다.

쿠웨이트와 카타르 출신이 동시에 출마해 중동표가 갈리는 바람에 어부지리를 얻는 등 운도 따랐다.

정몽준은 이후 FIFA 부회장 직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정몽준은 울산에서 차를 타고 가다가 축구하는 모습만 보면 "차 세워"라고 한 뒤 옷을 갈아입고 축구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3백5㎜짜리 운동화를 신는 왕발이라 축구화는 늘 차 트렁크에 실려 있었다.

해외출장을 가서도 여독은 운동으로 풀어야 한다며 오전 6시면 어김없이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92년 대선 때 정몽준의 비서를 한 뒤 93년 축구협회로 함께 옮겨간 김원동(프로축구연맹 사무국장)은 "정몽준은 지는 걸 몹시 싫어해 태클도 마다하지 않았다"며 "타고난 체력으로 하루에 몇 게임이건 지칠 때까지 뛰곤 했다"고 전했다.

정몽준의 포지션은 센터포드다.

어쨌든 FIFA 부회장에 당선된 정몽준은 이후 2년간 월드컵 유치에 몰두했다.

하지만 월드컵 유치는 FIFA 부회장 선거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일본은 이미 89년 11월 유치전에 뛰어들어 로비를 하고 있었다.

아벨란제 당시 FIFA 회장도 공공연히 일본 편을 들고 있었다.

정몽준은 97년 일본의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상황이 열악했지만 나에겐 아버지가 올림픽을 유치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노하우가 있었다.

그것은 명분과 인간관계, 이 두가지를 적절히 활용하면 안될 게 없다는 비법(秘法)이었다.

" 일본과의 피를 말리는 접전이 펼쳐졌고, 결국 96년 6월 공동개최를 이끌어냈다.

90년대 정몽준의 삶은 축구협회장과 월드컵 유치 및 조직위 활동 등 온통 축구로 채워져 있다.

출근도 보통 축구협회로 했고,일정이 바쁠 때는 점심식사 도중이라도 축구협회 브리핑을 받곤 했다.

정몽준이 축구계에서 독주하면서 갈등도 빚어졌다.

96년 말 축구협회장 재선을 앞두고는 반(反)정몽준 세력이 한데 뭉쳐 경선을 요구했다.

정몽준이 외국으로만 나돌 뿐 국내축구 발전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결국 경선을 실시해 정몽준이 압도적 승리를 거뒀지만,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정몽준이 경선을 했다는 사실에 무척 기분 나빠했다"고 전한다.

체육계 리더 자리를 놓고 김운용(金雲龍)IOC 위원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고 월드컵조직위를 무난히 이끌던 최창신 사무총장을 전격 경질,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조직위 공동위원장을 맡은 이연택(李衍澤)과 잦은 마찰도 노출됐다.

월드컵의 공(功)을 혼자서 독식하려 한다는 비판도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정몽준의 독특한 업무스타일은 축구계에서도 적지 않은 파열음을 만들어 냈다.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공항에 조금 늦게 마중나왔다고 나이 많은 임원에게 큰소리로 호통치는 것은 예사"라며 "요즘엔 좀 덜하지만 전에는 손도 자주 올라갔다"고 했다.

또 다른 관계자의 얘기다.

"한번은 거금을 들여 외국 국가대표팀을 초청했는데 졸전 끝에 경기에서 패했다.

정몽준은 그날 저녁 곧장 회의를 소집해 임원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숨막히는 분위기였다.

" 칭찬에는 인색하고 애정표시나 의례적인 스킨십도 안한다는 원망의 소리도 들린다.

정몽준의 뚝심을 말해주는 사례도 많다.

"2000년 말께 일본조직위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 내에서 판매되는 입장권에는 日.韓이라고 표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실무진의 유연한 입장과 달리 정몽준은 강경했다.

韓.日은 정식등록된 상표이며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정몽준은 이를 관철했다.

하도 조목조목 따지자 FIFA 집행위원들도 나중에는 손을 내저을 정도였다.

"(문동후 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정몽준은 2000년 12월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데려온다.

히딩크 카드는 정몽준의 작품이었다.

한국대표팀이 월드컵 첫 승을 올리고 16강에 오르기 위해서는 유럽 축구에 대한 공포심을 없애는 게 급선무라는 판단 아래 유럽축구에 정통한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때문에 지난해 중반 히딩크에 대한 비판이 한창일 때도 실제 히딩크의 입지가 위태로웠던 적은 없었다고 한다.

정몽준은 16강의 적임자는 히딩크라고 계속 밀고나갔다.

정몽준은 최근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월드컵 4강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했다.

"제 이름이 몽준이지 않습니까? 몽은 꿈 몽(夢)자이고, 준은 영어로 6월(June)이니까 결국 꿈같은 6월을 보낸 셈이죠." 2002년 월드컵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한국축구는 당초 목표였던 1승은 물론 16강을 넘어 4강신화를 달성했다.

우려했던 테러사태도 없었고 공동개최국 일본과의 경쟁에서도 절대 우위를 보였다.

그러는 동안 정몽준 자신도 월드컵 붐을 타고 유력한 대선주자로 부상했다.

BC폐인™
2002-09-20 10:04:20
3658 번 읽음
  총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조은영 '02.10.18 4:50 PM 신고
    모두들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을 뽑으세요. 재벌은 정몽준, 과거부터 한 자리 하던 분들은 이회창, X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던 사람은 노무현 아니면 권영길....... ↓댓글에댓글
  2. 2. 정호찬 '02.9.24 1:43 AM 신고
    두고봐야지....근데 우리나라는 노동당이 너무약해..영국 그런데는 노동당 파워가 대단하던데..우리나라도 언젠가는 그리되것지요 ↓댓글에댓글
  3. 3. 홍 길동 '02.9.20 11:22 PM 신고
    글쎄..... 될까? ↓댓글에댓글
  4. 4. 박한솔 '02.9.22 8:54 AM 신고
    과연.....음... ↓댓글에댓글
  5. 5. 이상선 '02.9.20 1:17 PM 신고
    정몽준 청년때 잘생겼네..`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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