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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입장 난처하신 분들에게...

 


10월 9일은 556돌 한글날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에서 온 괴물 같은 낱말 하나가 우리말을 마구 짓밟고 있습니다. 수십 가지 우리말이 이 낱말 앞에선 맥을 못 춥니다. 괴물의 모습을 한번 알아볼까요?

여러분도 '입장(立場) 난처하다'라는 말 자주 하십니까?
많은 사람이 흔히 쓰는 말이죠. 바로 이 '입장'이 그 괴물의 정체입니다.
우선 이 괴물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몇 가지 낱말의 뜻풀이를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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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立場):당면하고 있는 상황. '처지(處地)'로 순화.
난처(難處):'난처하다'의 어근.
난처하다: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어 처신하기 곤란하다.
처지: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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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는 것처럼 '입장'을 '처지로 순화'하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이 말이 일본어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사전에서는 아예 '처지'의 일본식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난처하다'라는 말도 결국 '처지가 어렵다' '처신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입장 난처하다'라는 말은 '난처하다'라는 한 낱말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우리말도 아닌 '입장'을 덧붙여서 복잡하게 얘기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 '입장'이라는 말이 단순히 '처지'의 대용어로만 쓰이는 게 아니어서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이른바 보통사람부터 저명인사까지 쓰지 않는 사람이 없는 데다 그 뜻은 눈밭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엄청나게 불어나고 있습니다. 신문, 방송, 출판물, 공문서는 물론이고 '처지'로 순화하라고 해 놓은 표준국어대사전까지 '입장'을 마구잡이로 쓰고 있습니다.

사실 신문사에 몸담고 있는 저로서는 이 '입장'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난처'하였습니다. 신문만큼 '입장'을 남용하는 매체도 드물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이 '말글 돋보기'에서 가장 먼저 다뤄 보고 싶은 것이었는데도 이제나저제나 하며 미뤄 왔습니다.

이 '입장'이 모든 이들에게 인이 박인 듯이 쓰이는 것을 보면 이를 우리말로 받아들이자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아래에서 밝혀 보이겠지만 이 '입장'이 너무 많은 우리말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여 선뜻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입장'이 쓰인 문장을 살펴보면 '입장'은 그 쓰임새에 따라 '처지, 위치, 형편, 상황, 자리, 직책, 방침, 태도, 자세, 견해, 의견, 주장, 판단, 해명, 생각, 체면, 시각, 관점, 인식, 원칙, 뜻, 심정, 동향, 노선, 의지, 결심' 같은 말 가운데 하나로 바꿔 주면 뜻이 더 확실해집니다. 심지어는 아예 '입장'을 없애 버려야 뜻이 더 분명해집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입장'이 쓰이는 경우를 보면 이게 혹시 적당히 얼버무리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기껏 '이러이러하다'라고 주장하는 듯하다가도 '입장'이라는 낱말 하나만 끼워 놓으면 그게 주장인지, 아닌지 모르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살펴보시면 '입장'이라는 말이 얼마나 애매한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얼버무리는 데는 이처럼 유용한 말도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정치인이나 정당, 정부기관의 대변인이라는 이들이 특히 애용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이 '입장'이 우리말을 어떻게 좀먹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전들보다 용례를 풍부하게 제시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CD)에서 뜻풀이에 '입장'을 포함하는 표제어를 검색해 보았습니다. 무려 560개가 나왔습니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입장(入場)'도 들어 있습니다만 대다수가 '입장(立場)'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몇몇을 들어 '입장'이 어떻게 쓰였는지, 대체할 수 있는 우리말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560개나 되는 표제어의 뜻풀이와 용례를 일일이 다 확인해 볼 수는 없는 일이라 무작위로 뽑아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제가 추려놓은 것을 모두 읽기에는 버거울 것입니다. 저와 마찬가지로 몇몇만 추려서 보아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대표 사전이라고 할 만한 표준국어대사전이 이럴진대 우리의 말글살이에 이 '입장'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하여 우리 말글을 어지럽히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괄호 속의 낱말은 '입장' 대신 쓸 수 있는 낱말입니다. 괄호 속의 '삭제'와 그 뒤의 말은 '입장'의 대체어를 찾을 필요도 없이 말투만 바꾸면 됨을 뜻합니다. 작가 및 작품 이름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인용된 그대로입니다.

●가치교육학(價値敎育學):가치 철학의 입장에서 교육 현상을 해명하려는 학문.(관점)
●강경 입장을 고수하다.(태도, 방침)
●그는 마을에서 방울이를 마주 대하기가 겸연쩍어 되도록이면 피하는 입장이 되었다.≪문순태, 타오르는 강≫(삭제·되도록이면 피하게 되었다)

●신문사는 양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두 전문가의 기고를 모두 실었다.(주장, 또는 삭제·양측을 대변하는)
●날이 밝기 전에 기필코 결판을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윤흥길, 완장≫(처지, 또는 삭제·안 되게 되었다)
●내부자거래(內部者去來):증권 회사의 임직원이나 주요 주주가 그의 입장을 이용하여 입수한 정보를 기초로 주식을 사고파는 일.(지위, 직책, 또는 삭제·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귀관들의 귀대 시간은 익일 오후 두 시까지다. 만일 이 시간에 일 분이라도 늦는 자가 있다면, 나는 구대장의 입장으로 귀관들에게 가차 없이 연대 책임을 물을 것이다.≪홍성원, 육이오≫(삭제·구대장으로서, 말하는 사람의 직위 등이 이미 드러나 있을 터이므로 '나는 구대장의 입장으로'를 모두 삭제하는 것이 더 좋을 듯)
●익삼 씨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복통 터질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윤흥길, 완장≫(처지, 또는 삭제·익삼 씨로서는)
●그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고 얼넘기게 되면 내 입장이 난처해진다.(삭제·내가 난처해진다, 또는 내 처지가 곤란해진다)

●이승만 박사가 지금이라도 민족을 생각하는 입장이라면 자유당을 키우려 하지 말고, 지공무사의 심정으로 8·15 때처럼 거국 내각을 꾸며 가지고 이 폐허 더미로 화한 현실을 모든 면에서 재건하고….≪박태순, 어느 사학도의 젊은 시절≫(삭제·생각한다면)
●이쪽은 아들을 가진 쪽이라는 친부의 우월감만 뺀다면 실상 며느리를 단죄할 만큼 떳떳한 입장도 아니었다.≪박완서, 미망≫(삭제·떳떳하지도 못했다)
●관능주의(官能主義):감각을 생성하는 감각 기관의 기능이 미(美)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고, 관능 중에서 미를 추구하려는 입장.(태도)

●비록 그들에게 밥을 구걸하는 입장이지만, 그들이 자기를 걸인이 아닌 당당한 신사로 대해 주기를 희망했다.≪홍성원, 육이오≫(형편)
●농업수리학(農業水利學):농작물을 기르는 입장에서 물과 땅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여기에 쓰인 '입장'의 뜻은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농업과 관련하여 물과 땅의…' 정도가 되면 충분할 듯합니다)
●그 나라는 우리나라와 단교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통보했다.(방침, 또는 삭제·계획이라고 통보했다)

●당파(黨派):조선 시대에, 정치 세력 결집 단체였던 붕당(朋黨) 안에서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다시 나뉜 파벌.(노선, 견해)
●총학생회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대자보를 붙였다.(주장)
●문화 진화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여 도식적 입장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삭제·도식적으로는)

●저희들은 대원위 합하께오서 왜국의 유혹에 동요하시고 그동안 견지해 오시던 자주적인 입장을 버리시는 줄만 알았습니다.≪유현종, 들불≫(생각, 태도, 정책)
●보아주다:남의 입장을 살펴 이해하거나 잘못을 덮어 주다.(형편, 처지)
●북관곡(北關曲):조선 숙종 1년(1675)에 송주석(宋疇錫)이 지은 유배 가사. 덕원(德源)으로 귀향 가는 조부 송시열을 동행하여 그 전후 사실과 행색 및 노정을 노래한 것으로, 임금에 대한 충성심과 정적(政敵)에 대한 적개심, 자신의 결백함과 친척에 대한 그리움을 조부의 입장에서 읊었다.(처지, 심정)

●난 문학을 할 작정이오. 어느 정도 객관성을 지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편부당한 입장을 견지하는 문학을 할 작정이오.≪이병주, 지리산≫(자세, 또는 삭제·불편부당한 문학을)
●새중간에서 입장만 난처하게 되었다.(삭제)
●성명(聲明):어떤 일에 대한 자기의 입장이나 견해 또는 방침 따위를 공개적으로 발표함. 또는 그 입장이나 견해.(주장)

●그는 사장과 대등한 입장에 올라섰다.(지위, 위치, 직책, 자리)
●역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재정리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있었다.(관점, 시각, 또는 삭제·자주적으로 재정리하려는)
●더구나 체포해 온 부하에게 그의 무죄를 해명해야 하는 옹색스러운 입장에 처하고 싶지도 않았다.≪조정래, 태백산맥≫(상황, 형편)

●이 사건에 대한 입장이 두 갈래로 판연하게 갈린다.(시각, 태도, 주장)
●다만 지금의 이 결론이, 단지 수양 자기의 억측이라던가 한명회의 보고가 허보라던가 하여야 안평의 입장이 서게 될 터인데….≪김동인, 대수양≫(체면)
●형사소송(刑事訴訟):형벌 법규를 위반한 사람에게 형벌을 부과하기 위한 재판 절차. 유죄 판결을 요구하는 검사와 방어하는 입장의 피고인이 대립하고, 제삼자인 법원이 판단한다.(삭제)

이처럼 스스로 '처지'라고 순화하도록 밝힌 표준국어대사전조차 마구잡이로 '입장'을 쓰고 있습니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심지어 신문 방송 같은 언론매체들이 이 '입장'이 없으면 말을 이을 수 없고, 글을 마무리할 수 없다고 여기는 듯해 정말 답답합니다.

알맞은 우리말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외래어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입장' 같은 남의 나라 말을 마구잡이로 써서 멀쩡한 우리말 수십 가지를 쓸모없게 만드는 어처구니없는 일은 하루빨리 사라져야하지 않을까요? 이제 '입장'을 버립시다.

한글날을 맞으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3springs@donga.com


2002-10-29 16:28:18
1767 번 읽음
  총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1. 장재영 '02.11.21 11:48 PM 신고
    근데..이런 문제는 많이 어려울듯 싶네요..국어는 기초부터 튼튼해야 아니깐..근데..지금의 우리 나라는 기초..부터 꼭대기까지 갈아야하니...어델 손봐야할지..글구 지금의 인터넷에서 떠도는 해괴망측한..언어들..그걸 쓰면서두 자 ↓댓글에댓글
  2. 2. 장재영 '02.11.21 11:50 PM 신고
    랑스레 쓰는 이나라 사람들 남들 탓하기전에 우선 자신들을 돌이켜보세요...과연 나는 이나라에 얼마나 충성하면서 살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원했는지요..혹 충성은 고사하고 엄청난 댓가를 원하시진 않았는지요..생각을...생각을.. ↓댓글에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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