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와 홈런역사.*
박찬호가 홈런으로 메이저리그 팬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지난 9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에 만루홈런 두방을 허용한 사건.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을 기록이다.
어찌보면 박찬호에게는 불명예스런 기록일 수도 있지만 항상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도 있는 법.
역사는 항상 승자만을 기억한다고 누군가는 말하지만 패자가 없으면 승자도 없다.요즘 인기를 누리는 TV 드라마 ‘왕건’이 시청자의 사랑을 받은 까닭도 역사책에서는 패자로만 그려졌던 ‘궁예’를 새롭게 해석해서였다.
박찬호는 타티스에게 두번다시 기억하기 싫은 홈런을 맞았지만 그날의 충격으로 더욱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이후 절치부심한 끝에 결국 올스타 투수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트라셀과 맥과이어.*
지난 98년 메이저리그는 맥과이어의 홈런열풍에 뜨거웠다.그가 37년간 잠자고 있던 한시즌 최다홈런 기록경신을 향해 돌진하자 전 세계가 관심을 가지고 홈런행진을 지켜봤다.
맥과이어는 9월27일 부시스타디움에서 시즌 62호 홈런을 때렸다.시카고 커브스전이었고 맥과이어에게 영원히 기록에 남을 뼈아픈 홈런을 맞은 투수는 스티브 트라셀이었다.
맥과이어가 홈런을 치자 장내아나운서는 “웨이크업 매리스”라고 외쳤다.베이브 루스가 지니고 있던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한 뒤 루스의 추종자들로부터 수많은 비난과 협박을 받으며 은둔하다시피 살아야 했던 불운했던 영
웅에게 보내는 헌사였다.
관중들이 기립해서 함성을 지르는 순간 조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바로 홈런을 맞은 투수 스티브 트라셀의 행동이었다.그는 다이아몬드를 일주하는 맥과이어에게 다가가 진정으로 축하한다는 악수를 청했다.
아마 우리 야구장에서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투수로서는 불명스런 홈런을 맞은 뒤에 벨도 없이 그 타자를 축하해주다니…
그러나 상대의 멋진 플레이를 인정하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걸어주는 것이 오늘의 메이저리그를 만든 바탕이었다.비록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영원히 창피한 기록으로 남아 이름이 오르내리겠지만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정
신이 없었더라면 조 디마지오의 56연속경기 안타같은 대기록은 없었다.
그렇기에 트라셀은 뼈아픈 홈런을 맞고도 축하의 악수를 건낼 수 있었다.트라셀은 경기 뒤 역사의 동반자가 된 소감을 묻자 “내게 그것이 오지 않기를 기원했다.나도 은퇴한 뒤에 그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라
고 솔직하게 말했다.
*랄프 브랑카와 보비 톰슨.*
박찬호가 칼 립켄 주니어에게 화려한 진달래 꽃을 뿌려주던 그날 올스타전의 명예주장으로 초대된 양팀의 올드스타는 너무나 상징적이었다.
랄프 브랑카와 보비 톰슨.두사람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을 때리고 맞은 사람들이었다.
1951년 페넌트레이스에서 동률을 기록한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자이언츠는 월드시리즈 진출팀을 가리는 플레이오프 3차전까지 갔다.다저스가 9회말 1사 1·2루까지 4-2로 앞섰으나 역전 3점홈런이 터졌다.
자이언츠의 보비 톰슨이 때린 그 홈런은 이후 ‘전 세계를 울린 한방’으로 남아 전설이 됐다.톰슨 얘기만 나오면 꼭 등장하는 이름이 브랑카였다.서양인들이 가장 불길하다고 생각하는 ‘13’을 용감하게도 등번호로 달았던 그
는 올스타전에 톰슨과 함께 다정하게 등장해 팬들에게 향수를 줬다.
50년의 세월이 지나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뼈아픈 홈런을 맞은 투수를 결코 잊지 않고 초대하는 메이저리그나 기꺼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는 그들의 여유가 참으로 부럽게 느껴졌다.
먼 훗날 칼 립켄이 톰슨의 나이가 돼서 올스타전에 초대를 받았을 때도 박찬호가 맞은 그 날의 홈런은 팬들의 기억속에서 살아 숨 쉴지도 모른다.
그날 박찬호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함께 립켄의 손을 잡고 등장할 지 아니면 더욱 유명한 기록을 세우고 다른 모습으로 등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