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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기원

 

야구의 기원과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야구는 미국에서 가장 민속적인 스포츠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야구는 과연 언제, 어디에서 탄생했을까? 야구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1907년 메이저리그는 밀스 위원회를 결성했다. 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야구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생도였던 애브너 더블데이(Abner Doubleday)가 1839년 여름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고안한 것으로 추정된다.



애브너 더블데이의 초상화


애브너 더블데이는 남북전쟁의 전쟁영웅으로 북군의 명장이었다. 야구가 더블데이에 의해 고안되었다는 주장은 애브너 그레이브스라는 전직 광산 기사의 의심스러운 증언에 기반하고 있다. 그레이브스는 자신이 오래 전 더블데이 장군이 참가한 야구 경기를 직접 목격했다고 주장했다. 그레이브스의 증언은 당시 위원회 위원이던 앨버트 스폴딩(Albert G. Spalding)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스타 투수 출신이자 당시 스포츠 용품업계의 실력자이던 스폴딩은 미국적 애국심에 불타는 인물이기도 했다.


스폴딩은 위원회의 동료들에게 굳이 헛수고를 더하지 말고 '야구=더블데이의 고안품'이라는 그레이브스의 증언을 받아들이자고 설득했다. 마침내 위원회의 최종 보고서가 발간되자 더블데이가 지금의 모습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야구 경기를 고안했다는 전설은 역사적 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아직도 이 결론은 수많은 반론에도 불구하고 많은 스포츠 책자에서 소개된다. 비판자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애브너 더블데이는 1839년 쿠퍼스 타운을 방문한 적이 없으며, 그의 일기장 어디에도 야구에 관한 언급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블데이가 고안했다고 위원회에서 소개한 야구 경기의 형태는 당대였던 1900년 대 초반의 그것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역사가들은 야구는 미국의 독자적인 발명품이 아니라, 유사 이래 세계 도처에서 행해졌던 수많은 종류의 공과 막대기로 하는 놀이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주장을 여러 차례에 걸쳐 입증해왔다. 소비에트 연방의 프로파갠더들은 러시아에도 '랩터(lapta)'라는 야구의 선조 뻘이 되는 게임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기 미국 사회에서 행해졌던 야구의 모태 격에 해당하는 경기들은 영국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이런 놀이들은 '패들 볼(paddle ball)', '원 올드 캣(one-old-cat)', '라운더스(rounders)', '타운 볼(town ball)' 따위의 이름으로 불렸다. 특히 타운 볼은 식민지 시대 뉴 잉글랜드 지역에서 인기를 모았으며, 사료에 의하면 어린이, 어른 가리지 않고 야외에서 볼과 배트를 들고 시합을 즐겼다고 한다



엘리지언 필드(뉴욕주 호보큰)

게다가 '야구(baseball, 혹은 base ball)'라는 용어가 활자 매체에 출현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 령 밸리 포지에서 조지 워싱턴 군대의 군의관을 지냈던 앨비전스 왈도 같은 인물은 휴식시간 동안 배트로 공을 치고 베이스를 도는 군인들의 모습을 시로 묘사했다. 1820년 대 초반 무렵 소설가 새뮤얼 홉킨스 애덤스의 조부는 멈포드 씨의 방목지에서 베이스 볼(base ball) 경기를 하는 광경을 생생하게 회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1834년 로빈 카버는 스포츠(Book of Sports)라는 책에서 베이스(base), 혹은 골 볼(goal ball)이라 불리운 미국식 라운더스 경기가 크리켓과 함께 미국에서 인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크리켓은 야구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초기 야구 기자였던 헨리 채드윅(Henry Chadwick)은 batsman, playing for the side, exellent field 등의 크리켓 용어를 야구 경기를 설명하기 위해 차용했다. 야구 혁신의 선구자로 꼽히는 해리 라이트(Harry Wright)는 전직 직업 크리켓 선수에서 야구 감독으로 변신한 인물이었으며 야구를, 프로페셔널 스포츠로 발전시키는 데 있어 많은 부분을 크리켓에서 빌어왔다.


결국 야구 경기는 공과 배트로 하는 여러 종류의 비공식적인 경기들이 혼합되면서 점점 발전했고, 크리켓이란 공식 경기의 영향이 더해져 힘입어 탄생한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배를 빌어 예수가 태어난 것과 같은 거창한 탄생 설화는 야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1840년 대까지 많은 종류의 비공식적인 경기들이 경쟁했다. 그 중에서 메사추세츠 주와 뉴욕 주에서 열렸던 경기는 매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물론 이 경기들은 서로 다른 규칙과 방식으로 행해졌다. 메사추세츠 방식에서는 비대칭적인 사각의 필드에 네 개의 베이스를 놓고 경기가 열렸다. 각각의 베이스 간 거리는 일정하지 않았다. 스트라이커(striker)라 불린 타자는 홈 베이스에서 떨어져 타격을 했다. 야수들은 스카우트(scout)라고 불렸으며, 플라이를 직접 잡거나, 원 바운드 이내에서 타구를 처리하거나, 주자에게 공을 던져 맞춤으로써 아웃을 잡았다. 그러나 이 방식의 경기는 1840년 후반이 되면 거의 사라지게 된다. 뉴욕 니커보커 클럽의 멤버들이 고안한 방식, 즉 뉴욕 게임이 새로이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니커보커 클럽은 1845년 일단의 야심에 찬 신사 야구광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니커보커식 야구는 클럽의 일원이었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Alexander J. Cartwright)가 고안한 것이다. 카트라이트는 내야를 다이아몬드 꼴로 규격화했으며, 베이스 간 거리를 9피트(27.43m), 투수와 포수 간의 거리를 45피트(13.71m)로 정했다. 오버핸드 투구는 금지되었으며, 스트라이크 세 번은 아웃으로 정해졌다. 직선 타구나 한 번 튀긴 공을 잡아도 아웃이었으며, 내야 땅볼을 잡아 타자가 1루에 도달하기 전에 던져도 아웃이었다. 한 팀은 아홉 명으로 구성되며 스리 아웃이 되면 공수를 교대하게 되어 있었다. 카트라이트가 만든 규칙은 현재의 야구 경기의 기초가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규칙들은 변했지만(9이닝 제한, 투포수간 거리 조정 등) 경기의 큰 줄기는 변함없었다.



알렉산더 카트라이트




니커보커 팀이 만든 규칙집은 활자로 출판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자 뉴욕 게임은 남북 전쟁 전까지 뉴욕 주 및 여타 지역의 클럽들 사이에서 빠르게 채용되었다. 1850년대에는 많은 야구 클럽 들이 속속 창단되었고, 팀 간에는 활발하게 경기가 열렸다. 야구 경기는 당시 도시화,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던 미국 사회에서 시민들의 리크리에이션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60년대까지 미국의 도시 인구는 전체 인구의 1/6 수준으로 늘어났으며, 신문들은 도회지의 야구 경기 소식과 열기를 기사화했다.


야구 경기는 미국 북부와 중서부 지역에서 주로 성행했다. 그 중 가장 열기가 높은 지역은 뉴욕이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자면 야구 경기는 도시 반경 10 마일 이내의 모든 이용가능한 초지에서 행해졌다. 예전부터 설립된 클럽들이 야구 붐을 이끌었다. 클럽은 회원과 클럽하우스,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많은 클럽들 중에서 역시 니커보커 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니커보커 클럽은 경기 조정인(arbiters of play, 즉 심판), 시합 규칙, 경기 매너 등을 채택함으로써 야구 경기의 룰을 확립해 나갔다. 당시에는 리그도 없었고 사전에 확정된 경기 스케줄도 없었고, 클럽 서기들 사이의 서신왕래를 통해 공식 경기가 치러졌다. 그러나 다른 클럽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니커보커 클럽은 다른 클럽과의 경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야구는 신사들의 독점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또한 아마추어 규정에도 구속되지 않고 다이내믹하게 발전해 나갔다. 1850년대의 끝무렵이 되자 아마추어리즘보다는 승리와 입장 수입이 더 중요한 요소로 되었다. 이렇게되자 아마추어적인 기준과는 상관없이 기량이 우수한 선수들을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다. 1858년, 니커보커 클럽은 새로이 결성된 '내셔널 어소시에이션(National Association of Base Ball Players)'에 그간 누려왔던 우월한 지위를 내주게 된다. 그 해 스물 다섯 개 클럽의 대표들은 연합체를 결성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야구 규칙의 성문화, 클럽 및 클럽 간의 경쟁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니커보커 클럽(1859년)

어소시에이션은 빠른 속도로 야구 경기의 조정자라는 지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어소시에이션에서 제정한 초기 룰 중에는 피처스 박스(pitcher's box)의 설정과 9이닝 경기 규칙이 포함된다. 또한 어소시에이션은 경기 입장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그 해 뉴욕 올스타 팀과 브루클린 올스타 팀 사이의 경기를 관전한 1,500명의 관중들은 1인당 50센트 씩을 지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리그나 공식적인 스케줄은 아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소시에이션의 권위는 광범위하게 인정되었다. 어소시에이션은 National Association of Amateur Base Ball Players로 개명한 1871년까지 지속된다. 1871년의 명칭 변경은 새로운 National Association of Professional Base Ball Players가 설립되자 자신들을 이들과 구분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소시에이션이 반쪽짜리로 된 것은 피할 수 없었다.


1860년대에 대략 60개의 클럽들이 첫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에 가입해 있었다. 대부분은 동부와 중서부의 클럽들 이었으며 소수의 대학팀들도 포함된다. 남부 지역의 클럽들이 없었던 이유는 당시에 남부와 북부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북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야구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남부 지역은 메이저리그 야구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있었다. 남북 전쟁이 남긴 작은 전설 중의 하나는 전쟁으로 인해 메이저리그의 프랜차이스가 동부와 서부에 편중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전쟁은 60만의 생명을 앗아갔지만, 전쟁으로 인해 야구는 전미국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양군의 병사들은 캠프와 포로 수용소에서 야구를 즐겼으며, 이들로 인해 야구에 대한 관심은 증폭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한층 더 거대한 야구 붐이 북부 지역을 강타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야구 열기는 잠시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브루클린 익셀셔즈, 브루클린 엑포즈, 브루클린 애틀랜틱스 같은 강팀들은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팬들을 기쁘게 했다. 당시 익셀셔즈 팀의 투수 짐 크레이튼은 대중적인 영웅이었다. 그는 익셀셔즈 팀을 1860년의 이스턴 투어(eastern tour)에서 우승시켰다. 1862년과 1863년 엑포즈는 미국 최강팀이었으며, 딕키 피어스가 이끈 애틀랜틱스는 1864년과 1865년 시즌에서 불패의 신화를 자랑했다.


귀향 군인들에 의해 촉발된 야구 인기로 전후 미국 사회에서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붐이 일었다. 1865년에 야구는 미국의 국기로 칭송되어졌다.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클럽들이 야구 인기의 증거가 될 것이다. 1865년 91개이던 어소시에이션 가입 클럽은 이듬해 200여 개로 늘어났으며 1867년이 되자, 등록된 클럽 수는 중서부 지방의 100여 개를 포함하여 300개를 넘어섰다. 1867년에 워싱턴 내이션즈 클럽은 전례없던 중서부 투어를 감행했다. 순례 도중 내이션즈는 단 한번밖에 패하지 않았다. 유일한 1패는 예고없이 치러진 일리노이 주의 록포드 포레스트시티 팀과의 경기였다.


내이션즈 클럽의 순회 경기는 팀 간 경쟁이 보다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지만, 리그의 조직이나 경기 스케줄의 확정 등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대중 스포츠 신문이던 뉴욕 클리퍼 지의 편집인이던 프랭크 퀸은 매년 최고의 팀과 베스트 나인 플레이어들을 선정해 시상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후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잡음이 많았다. 그러는 와중에서 경기 방식은 1860년 대를 거치며 발전했다. 투수들은 팀에서 가장 수동적인 존재로 변했으며, 캔디라는 별명으로 불린 아더 커밍스는 허리를 꼬는 투구법과 커브볼을 유행시켰다. 야수들은 보다 많이 움직이게끔 되었으며, 주자들은 야수의 태그를 피해 슬라이딩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때에 원 바운드 볼을 잡으면 아웃이 되는 규칙이 없어졌다.



짐 크레이튼

허약한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은 전후의 야구 열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어소시에이션은 여러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상업주의의 만연은 그 중 하나였다. 더 많은 클럽들이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으며, 일부는 선수들에게 입장권 영수증을 나누어 주는 방법으로 보수를 지불했다. 이런 조류 때문에 야구를 직업으로 하는 선수들의 수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이 존재는 어소시에이션이 명문화하고 있던 아마추어 정신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1863년에 어소시에이션의 지도부는 이 문제에 관해 회의를 열었지만 우유부단한 그들은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프로페셔널'들에게도 회원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이듬해 어소시에이션은 직업 선수(professional player)를 금전, 주거, 수당을 목표로 뛰는 야구 선수로 규정했다. 이 규정은 직접 급여를 받거나, 입장 수익을 배분받거나, 위장 직업을 가지고 있던 많은 선수들에게 적용되었다. 게다가 직업 선수들 중 일부는 더 나은 보수를 위해 다른 클럽과 계약을 맺기도 했다. 떠돌이들(revolvers)로 알려지게 된 이들은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의 허약한 권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babuangel
2001-07-31 02:40:01
1194 번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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