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일본 고노 임상의학 연구소에서 제시한 ‘IT 건망증’ 자가 진단 항목이다. 일상 생활 중 흔히 경험하는 일이지만 이중 절반 이상이 해당된다면 IT 건망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 외우고 있는 전화번호가 회사 관련 번호와 집 전화뿐이다.
△ (직장동료 아닌) 친구와의 대화 중 80%는 메일을 통해 이뤄진다.
△ 전날 먹은 식사 메뉴가 생각나지 않는다.
△ 신용카드 서명할 때 외에는 별로 손으로 글을 쓰지 않는다.
△ 처음 만났다고 생각한 사람이 사실은 전에 만났던 사람인 적이 있다.
△ “왜 같은 얘기 자꾸 하냐”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다.
△ 자동차 네비게이션 장치를 보거나 다른 사람이 도와줄 뿐, 지도를 보지 않는다.
컴퓨터, 휴대폰, PDA 등 각종 디지털 기기의 편리함은 새삼 설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일상 생활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입력해놓으면 되고, 약속시간이 되면 PDA가 알려준다. 복잡한 계산도 전자계산기나 PC에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매일 같이 전화하는 친구의 전화번호도 휴대폰이 없으면 기억하지 못한다.
각종 디지털 기기에 의존하면서 생긴 신종 질병, 이른바 ‘디지털 치매’가 확산되고 있다. 노인성 질환으로 알려진 치매 증상이 젊은이들에게서도 발견되는 것이다. 최근 테헤란로 주변의 신경정신과에는 건망증을 호소하는 젊은 IT인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 위치한 연세 유&김 신경정신과 유상우 원장은 “최근 젊은 층의 IT 종사자 중 사소한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며 기억력 장애를 상담해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들 스스로 디지털 기기 때문이라고 느끼지 못하지만 기기를 맹신하는 경향이 뇌 운동량 감소를 초래해 건망증의 원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디지털 치매의 대표적 증상은 ‘전화번호 건망증’. 대부분 휴대폰의 단축키를 사용하다보니 전화번호를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회사원 한상우(26)씨는 “집 전화번호는 물론 가끔 내 전화번호도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며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오는 날은 하루종일 불안하다”고 말했다.
애창곡 가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디지털 치매의 일종. 노래방에서 가사를 보며 부르는 습관이 가져온 증상이다. 디지털 기기에 자신의 일정을 맡겨버리는 사람 중에는 기기에 에러가 생기면 당장의 스케줄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출장이 잦아 항상 PDA에 일정을 기록한다는 김진태(33)씨는 “일정에 따라 알림 기능을 자주 사용하는데 기기에 에러가 생겨 바이어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디지털 치매는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뇌 운동량이 격감, 두뇌 능력이 쇠퇴해 생기게 된다.
일본 고노 임상의학 연구소는 최근 컴퓨터나 전자수첩, 워드프로세서, 자동차 네비게이션 등에 의존하면서 이런 증상을 나타내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고, 이를 ‘IT 건망증’으로 정의했다.
보고서는 “기억은 반복적인 뇌 운동이 필요한데 각종 기기들에 의해 뇌 운동이 사라지고 있다”며 “모르는 사이에 증상이 심해지면서 TV나 컴퓨터에 의존하는 시간이 늘고 외부와의 교류가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디지털 기기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과학기술에 의한 건망증(technologicala mnesia)’에 걸린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지금까지 테크놀로지에 의한 기억상실은 단지 일화 정도에 불과했으나 최근 학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과학 발달이 기억력 감퇴 주범?
이처럼 디지털 치매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자 디지털 기기 없이는 간단한 정보조차 기억할 수 없는 최악의 상태에 이를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사라졌던 주산학원이 어린이들을 상대로 다시 부활하고 있는 것도 최악의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주장도 있다.
칼럼니스트 박연호씨는 “기록이 사람의 두뇌 활동을 둔하게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기우가 아님을 보여주는 증세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이제는 인간이 디지털 기기에 완전히 종속될지 모르는 걱정스러운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일부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질병으로 간주하는 것은 지나친 기우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기억력 감퇴는 20대 이후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증상인데 디지털 기기에 빗대 확대 해석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PDA 칼럼니스트 김상규씨는 “디지털 기기 사용으로 기억력이 감퇴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것까지 외울 필요가 없어진 것”이라며 “전화번호 외울 시간을 창조적인 사고에 투자한다면 더 효율적이니 않느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주소, 전화번호 저장부터 일정 관리까지 PDA에 의존하고 있지만 PDA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등의 경험을 해본 적은 없다. 오히려 PDA가 기억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김씨의 생각이다.
김씨는 “건망증을 해소하기 위해 PDA를 구입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며 “디지털 기기는 기억력을 감퇴시키기 보다 기억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도구”라고 강조했다.
얼리어답터(www.earlyadopter.co.kr) 운영자 최문규씨는 디지털 기기가 ‘기억의 보조 수단’이라고 설명한다. 최씨에 따르면 최근 디지털 기기를 보조 기억 수단으로 활용, 비즈니스를 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소니의 디지털 카메라 ‘사이버샷U’와 ‘스냅’이 대표적 상품. 이들은 ‘메모리 북마크(Memory Bookmark)’라는 부제를 달고 출시된 제품으로 항상 휴대하면서 일상을 저장해둘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을 지원하고 있다.
인터넷의 즐겨찾기처럼 간단한 북마크 기능부터 책을 어디까지 읽었는지,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까지도 저장할 수 있다.
소지품을 잘 잃어버리는 사람을 위해 소지품 위치를 알려주는 제품도 있다. ‘Now You Can Find It’이라는 제품은 리모컨, 휴대폰 등에 키링을 채워놓고 본체의 버튼을 누르면 벨소리로 소지품의 위치를 알려주는 아이디어 상품이다.
이들 제품은 언뜻 ‘얼마나 건망증이 심하면 저렇게까지 할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오히려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최씨는 설명한다.
“기억을 못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의 보조수단 역할을 하는 것뿐이며, 이를 사용해 좀더 많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DVD 제작 프로그램도 이런 취지를 담고 있다. “정리하기 귀찮다고 캠코더로 촬영한 것을 TV에 연결해서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이를 DVD로 만들어 PC에 저장하면 저절로 정리가 되고, 오랜 시간 기억할 수 있다”고 최씨는 밝혔다.
디지털 기기의 사용으로 자질구레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어지고, 이로 인해 뇌의 운동량이 적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인간이 디지털 기기에 종속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예견되는 것도 이 때문. 그러나 디지털 기기를 단지 두뇌 능력을 감소시키는 용도로 사용하느냐, 보다 창조적인 사고의 수단으로 활용하느냐는 이용자의 몫이다.
연세 유&김 신경정신과 유상우 원장은 “국내에서도 현재 의료 정보학 쪽에서 디지털 치매와 관련한 연구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약을 잘못 사용하면 독약이 되듯이 같은 제품이라도 이용자의 활용도에 따라 디지털 치매를 일으킬 수도 있고,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