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빠 이야기
아영이는 7개월이 되도록 몸을 뒤집지 못했다. 보통 아이들은 석 달 정도면 자연스레 할 수 있는 일.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라 그저 늦되거니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설상가상, 전국 병원은 의약분업 여파로 인해 파업에 들어간 상태였다. 의약분업이 실시되지 않아 파업 대란에서 비켜서 있던 일산의 한 병원까지 찾아가 받은 정밀 검사에서, 결과를 알리는 의사 목소리가 웅웅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태아의 뇌는 임신 3개월까지 형성됩니다. 당시 대학교 1학년생이던 산모가 이 기간 동안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약을 먹은 것 같군요. 아이가 우뇌가 없고 좌뇌도 상당 부분 비어 있습니다. 좌뇌와 우뇌를 가르는 막도 만들어지지 않았구요.”
아영이 아빠는 아내와 함께 대전 집으로 돌아오는 2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약속했다. “우리가 낳은 아이였다면 아이에게 장애가 있다고 버릴 수 있겠나. 입양도 출산과 같다고 봐야 하니 우리는 평생 이 아이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그리고 2년이 지났다. 아영이 아빠는 “지난 8월엔 아영이 덕분에 미국까지 갖다왔다”고 자랑했다. 부인, 친아들 현찬이, 아영이, 아영이보다 2년 일찍 입양한 아영이 언니 하영이. 이렇게 다섯 가족이 오랜만에 함께한 나들이였다. 한국입양홍보회가 주선한 미국 교포 대상 공개 입양 홍보를 위한 2주일 간의 여행이었다. 공개 입양을 홍보하는 일도 의미있었지만 아영이 치료를 하다보니 다섯 식구가 오붓하게 모여본 시간이 언제인지 기억도 잘 안나던 터라 오랜만에 함께한 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엄연한 회사원인 아영이 아빠가 2주일 동안이나 공개 입양 홍보를 위해 자리를 비울 수 있었던 건 대현이 아빠 덕분이다.
딸만 둘이던 대현이 아빠는 1999년의 마지막 날 대철이를 입양했다. 2001년에는 대철이 형인 대현이를 데려왔다.
대현이는 여러모로 대철이와 달랐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데려온 대철이는 집안에 웃음꽃이 돼 주었지만 뇌 이상 때문에 아동장애인요양원에서 42개월을 보내고 온 대현이는 집안의 평화를 송두리째 뺏아갔다.
남자는 무조건 아빠, 여자는 엄마라 부르는 정도의 인지 수준이던 대철이가 바지에 똥 싸고 오줌 싸는 것은 기본. 집 안 아무데서나 침뱉기, 날계란 깨서 온 집안에 문질러 놓기, 손에 닿는 물건은 모두 던져 깨뜨리기, 밥 먹다 밥과 반찬 그릇을 손으로 휘저으며 장난 치는 것 정도는 약과였다.
뾰족한 못으로 대철이 눈과 귀를 찔러 온 집안을 뒤집어놓는가 하면 유치원에 다녀올 때면 늘 남의 물건을 잔뜩 집어왔다. 인지 수준은 형편없었지만 일찍 세상에 버려졌다는 걸 깨달은 아이의 눈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저리가라였다. 자기가 물을 먹은 후엔 꼭 엄마 물이라며 물 한잔을 더 가져왔다. 아빠가 거실에 있으면 베고 누우라며 베개를 가져왔다. 야단이라도 맞은 후엔 섬뜩할 정도로 히죽히죽 웃으며 더 품을 파고들었다.
아영이 아빠 전순걸 씨(41)와 대현이 아빠 김덕근 씨(46)가 처음 만난 것은 2001년 10월 한국입양홍보회가 마련한 공개 입양 부모 모임에서였다.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박사 출신으로, 삼성전기에서 정밀모터팀장을 지낸 김덕근 씨는 1997년 첨단 모터 제조업체 코모텍(코리아모터테크놀로지)을 설립하고 벤처 사업가로 변신했다. 이후 김 사장은 코모텍을 자본금 11억에 연 매출 45억원대 회사로 키워냈다. 대전의 한 호텔 경리담당 이사였던 전순걸 씨는 당시 실업자 상태였다.
그 해 8월, 전씨가 회사에 사표를 낸 건 순전히 아영이 때문이었다. 당시 전씨 가족은 뿔뿔히 흩어져 있었다. 부인은 아영이 치료를 위해 아영이와 함께 서울에서 살다시피 했고 전씨는 아들과 함께 대전에서 생활했다. 네 살배기 큰딸 하영이는 부산 이모집에 맡겨졌다. 아예 서울 근처에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자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두긴 했지만 재취업이 쉽지 않아 조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다.
모임 공식 일정이 끝난 후 이어진 저녁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같은 식탁에 앉게 된 두 사람. 식사 자리에서 전씨 사정을 알게 된 김 사장은 며칠 후 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사 규모가 조금씩 커지면서 마침 회사 살림을 전적으로 맡아줄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던 터였는데 좀 도와줄 수 없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당장은 어렵지만 임원들과 상의하고 임원 인터뷰를 거친 후 채용을 결정짓겠다는 얘기였다. 2001년 11월 전씨는 관리팀장 겸 CFO라는 직함으로 코모텍 식구가 됐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사정에 처한 아빠로서 서로를 보다듬어주는 최고의 친구가 됐다.
성공이 인생 최고 목표라고 생각했던 김 사장이 더불어 사는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음성 꽃동네를 다녀온 후였다. 코모텍 설립 이전 잠시 운영했던 봉제 자동화기기 업체를 외환 위기 직전에 정리한 김 사장은 부인 권유에 따라 카톨릭 신자가 됐다. 이후 코모텍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재기에 나설 때까지 꽃동네를 다니며 오웅진 신부 강의를 듣고 봉사 활동을 하던 중 한 사람을 알게됐다. 17세 때 전신마비가 와서, 말하고, 듣고, 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은 “나는 세 가지를 할 수 있으니 아직도 행복하다”고 했다. 이제껏 그렇게 편안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는 김 사장은 그 얼굴을 본 이후 “기업을 일으키고 성공을 위해 뛰는 삶이 꼭 정답은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1997년 말 “메카트로닉스 분야의 세계적인 업체”를 목표로 코모텍을 창업한 후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1999년 말에 김 사장은 대철이를 입양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수녀 분이 한 아이의 입양 가정을 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미혼모의 아들로 생후 2개월째라는 아이 얘기를 들은 후 하루 종일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 바로 부인과 함께 아이를 보러갔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아이를 보는 순간 부부는 그 아이가 김 사장을 꼭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데려온 대철이. 당시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생이던 두 딸은 갑자기 생겨난 남동생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울 정도로 대철이를 예뻐했다.
입양에 자신감이 생긴 김 사장은 부인과 한 아이를 더 입양하기로 결심했다. 둘째 딸과도 열 살 정도 차이가 나는 대철이에게 비슷한 터울의 형제를 만들어주기로 한 것이다. 동생보다 형으로 한 것은 둘째딸과 대철이 사이에 한 아이가 있는 게 아이들끼리도 더 좋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때 만난 아이가 대현이다.
10개월 이상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연장자 입양으로 불린다. 10개월 이상된 아이를 입양하는 것은 10개월 미만 아이 입양에 비해 수백, 수천 배 어렵다. 이미 인간관계가 어느 정도 형성되고 어렴풋이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감지하고 있는 상태라 새로운 부모에 대한 적응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뇌의 초기 발달 이상으로 대뇌반구가 분화되지 않아 향후 심한 정신지체와 운동 발달 지체가 예상되는 전전뇌증을 앓고 있었다. 대현이를 입양하기로 했던 스웨덴 양부모는 대현이의 자세한 상황을 알고 난 후 입양을 취소했다. 이후 대현이는 입양불가 판정을 받고 아동장애인요양원으로 보내져 교육은커녕 거의 방치되다시피 자랐다.
이런 대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향후 아이들의 결혼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입양을 반대했다. 일단 한번 가보기나 하자며 부부는 대현이를 만나러 갔다. 이 역시 인연이었을까. 첫눈에 대철이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통 생긴 것까지 김 사장을 꼭 빼닮은 아이가 들어왔다. 또래 아이들보다 언어발달 등이 좀 늦은 것 같긴 했지만 나머지는 다 정상으로 보였다. 그렇게 대현이는 김 사장네 식구가 됐다.
그러나 대현이는 온 지 꼭 일주일째 되던 날부터 본색(?)을 드러냈고 온 가족은 지쳐갔다. 그때를 김 사장은 이렇게 기억했다.
“머리로는 이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게 되지 않더라구요. 게다가 대현이에게 너무 시달린 아내는 만성두통이 생겨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요. 물건이었다면 바로 반품해 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파양(입양 파기)할까 고민도 많이 했지요. 실제로 연장아는 파양되는 경우가 3분의 2도 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미혼모와 입양부모가 만나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한 미혼모가 마지막에 “우리 아기들을 끝까지 사랑해주세요”하며 울더라구요. 그 날 대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보자 마음을 새롭게 먹었습니다. 그리곤 대현이를 데리고 다니며 언어 치료와 심리 치료를 꾸준히 받았지요. 다행히도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더군요.”
김 사장이 대현이의 장애를 알고 입양한 데 반해, 전 팀장이 입양한 아영이는 입양 후 장애가 밝혀진 경우다.
독실한 기독교도인 전 팀장은 부인과 선을 본 그 날 바로 프로포즈를 했다. 언젠가 형편이 되면 고아원을 운영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여자는 그때 처음 봤다고. 전 팀장 역시 오래전부터 같은 생각을 해왔고 뜻이 통한 두 사람은 부부가 됐다.
외환 위기 시절 TV에서는 연일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먼 훗날의 고아원 설립보다 당장 버려진 아이 한 명을 데려오는 게 더 의미있겠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홀트에 입양 신청을 했다.
1998년 초에 입양한 큰 딸 하영이는 중소기업 사장이던 친부 회사가 부도나면서 홀트에 맡겨진 아이였다. 생후 2개월째인 하영이를 입양한 후 아들 하나였던 전 팀장 부부는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딸의 재롱에 푹 빠져버렸다. 둘째딸 아영이를 데려온 때는 2000년 3월이다. 당시 태어난 지 한 달째였던 아영이는 34개월 만에 태어난 조산아인 데다 몸무게도 2.4킬로그램에 불과했다.
아이가 약간 늦되다는 설명도 들었던지라 정상적인 발달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부부. 그러나 7개월째가 돼서도 뒤집기는커녕 잘 움직이지도 않는 아이가 자꾸 이상했다. 검사 결과는 ‘선천성 뇌성마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부부는 주저앉았다. 이뿐인가. 전 팀장 장모는 “그 아이 때문에 내 딸 고생하는 모습은 절대 못 본다”며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친척들도 “입양을 해도 왜 그런 아이냐, 아영이는 돌려주고 다른 아이를 데려오면 되지 않느냐”며 부부를 설득했다.
그러나 부부는 지금까지 아영이를 애지중지 키워오고 있다. 물리 치료와 자극 치료를 위해 한 달에 100여 만원씩 드는 치료비도 아까워해 본 적이 없다. 내년부터는 언어 치료와 수중 치료를 병행할 계획이다. 우리 나이로 이제 네 살. 그러나 신체 나이는 3개월 정도인 아영이는 아직도 뒤집기를 못한다. 늘 누워 있거나 엄마 등에 업혀 있어야 하는 아영이가 수중 치료를 받으며 물속에서라도 두 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전 팀장 부부의 바람이다.
언어 치료는 물론 아영이에게 말문을 터주기 위해서다. 지금은 엄마 어딨어 하면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는 정도지만, 언젠간 아영이가 꼭 말을 할 수 있을거란 믿음이 있어서다. 이 계획을 위해 그렇게도 차를 무서워하던 전 팀장 아내는 최근 운전면허도 땄다. 아영이를 업고 병원에 다니다보니 관절에 이상이 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치료가 더 늘어나면 더 이상 대중교통을 이용해 아영이를 데리고 다니기는 무리라는 판단에서다.
마음에 걸리는 건 하영이다. 엄마, 아빠가 아영이에게 정신을 집중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하영이에게 신경을 덜 쓰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한동안 부산 이모집에 맡겨지기도 했던 하영이는 엄마, 아빠 전화만 오면 “보고 싶어”라며 울었다. 전화받으며 울기는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전 팀장은 “지금도 하영이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맙게도 이제 고등학생인 아들 현찬이는 이런 상황에 대해 한번도 불평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엄마, 아빠와 두 동생을 걱정하는 현찬이가 그저 대견할 따름이다.
2003년 계미년 설날도 두 가족이 모여 함께 보낸 김 사장과 전 팀장에게는 작은 소원이 있다. 두 사람의 아들 딸이 향후 입양아라는 사실에 괴로워하지 않고 떳떳하게 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두 사람은 입양아 캠핑과 연수원을 구상 중이다. 입양아들끼리 교류하면서 서로 동질성을 찾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일차 목표. 더 나아가 내가 좋아하는 선배도, 내가 아끼는 동생도 모두 입양아더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양이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두 사람이 공개 입양을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연구 결과 입양아들은 전 생애에 걸쳐 어떤 식으로는 자신이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언제,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입양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충격이 가장 덜 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입양홍보회는 “초등학교 시절 이전에 입양 부모로부터 자연스레 자신의 입양 얘기를 듣고 자라는 게 가장 충격이 적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 사장과 전 팀장 역시 이 같은 생각에 의견을 같이하기에 국내에 400여 쌍 있다는 공개 입양 부모 모임에 동참했다.
“이제 다섯 살인 하영이에게 ‘하영이는 누가 낳으셨어?’ 하면 ‘하나님’ 하고 대답합니다. 그 다음 ‘하나님이 하영이를 엄마, 아빠에게 선물로 주기 전에 잠깐 다른 곳에 맡겨놓으셨대. 거기가 어디지?’ 하면 ‘홀트’라고 하지요. 물론 하영이가 홀트와 입양에 대해 자세한 내용까진 잘 모르겠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하영이가 자신이 입양아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자라줬으면 하는 마음이지요.”(전순걸 팀장)
“어떤 사람들은 애를 입양했으면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키울 것이지 왜 떠들고 다니느냐며 노골적으로 비웃기도 합니다. 아이에게도 상처가 되겠지만 그럴 땐 저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우린 대현이와 대철이를 입양했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다니는 건 그게 모두에게 좋을거라 믿기 때문입니다.”(김덕근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