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보고 퍼온글임다...
【운명은, 때론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한다.
그 좌표와 나침반 없는 항해에서 살아남는 것은, 항해사들의 순간의 선택과, 신이 만든 기로에서 신이 주는 가호의 유무에 달린 것이다.】
오늘도 눈을 뜬다. 하얀 햇살이 얼굴로 와서 부딪히는 것이 아프게 느껴졌다. 하늘은 다시 푸르고, 바람은 다시 불어 올 테고 여전히 현관문 아래 작은 구멍 앞에는 오늘의 신문이 놓여있겠지.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기지개를 켰다. 언제나 같은 일상의 똑같은 출발. 오늘도 난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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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에 들어있는 돈은, 형편이 어려운 고향집에서 보내준 10만원이 전부이다. 이 10만원이 나의 한달 용돈, 평범한 신학도인 나는 학교에서 주는 장학금과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들이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렇다고 하던 공부를 그만 둘 수도 없어서 이 빈곤함을 해소하지 못한 채로 어렵게 살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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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젊은 여성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린 것은 너무도 억울하고 다시 생각해도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4개월쯤 전이었을 것이다. 같은 과 선배들이 사주는 술을 마시러 갔다가 약간 과음을 했을 뿐이었다. 선배들이 하나둘씩 가버리고 나는 술에 취한 채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거리의 네온사인을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는 결국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를 쳐버렸고 그 여자의 수술비를 비롯한 모든 것을, 그 날 밤 그 사채업자의 돈으로 충당했다. 나는 고마워했으며 다음날 깨어나 보니 나는 내가 원래 쓸 돈의 3배가 넘는 돈을 빌려버렸고 그 돈은 이미 내 손에 없었다. 그 돈이 어디로 증발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독촉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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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압류 당하고 내가 가지고 있던 많은 것들을 빼앗겼다. 그리고 남은 빚이 800만원 정도였는데 학교를 쉬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금씩 갚고는 있었지만 엄청난 이자는 그런 것들이 무의미하게 원금을 서서히 불려갔다. 그리고 폭행을 당했다. 그 젊은 여자 사채업자에게 무릎을 꿇고 반드시 이번 달 안으로 갚겠노라고 약속하고 돌아왔는데 집에 돌아오자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절망일 뿐이었다. 전기세를 내지 않아 끊어버린 전기가, 방안을 어둡게 가라앉게 한... 슬픈 의미의 침묵. 난 그것을 떨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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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을 만난 것은 사채업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난 열흘 후였다. 그 날도 파란 하늘에 시원한 바람, 어제, 그제와 하나 다를 게 없는 아침으로 내게 다가왔다. 쓸쓸한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워 걷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던 그 날 오전, 내가 전당포를 기웃거리며 본 것은 전당포 건물의 계단 벽에 붙어있는 한 장의 광고지였다. 급한 필체로 휘갈겨 쓴 광고지. 그 내용은 이 마른 마음에 떨어지는 샘물인 듯 나의 표정에 작은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기억을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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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광고지를 보고 찾아간 건물에는 세월을 고이 간직한 주름을 이마 가득 새겨 넣은 노인이 있었다. 허름한 옷에 남루한 차림새를 보니 나에게 특별히 큰 도움을 줄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저, 기억을 산다고 해서 왔습니다만… 그 기억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나는 말하며 노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어차피 턱을 뒤덮은 수염과 산발을 한 머리 때문에 그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노인의 얼굴에는 일순간 희색이 감돌았던 듯도 하다.
"자네, 나에게 기억을 팔러 온 것인가?"
노인의 목소리는 상당히 허스키했다. 청계산 골짜기에서 점을 보고 있는 사람을 동굴에 가둬놓고 한 3년 썩혀놓으면 저런 모양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설명해 주십시오."
"말 그대로 기억 말이네, 자네가 살아오면서 그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자네의 기억. 그것을 나에게 팔 수 있느냔 말일세."
이론상 불가능한 일이다.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뇌수를 끄집어내기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뇌사하지 않게 뇌의 일부를 잘라가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가격은… 얼마정도?"
이런 질문을 하는 내가 우스워진다. 불가능 한 일을 놓고 가격을 논하고 있다니.
"그것은 자네가 자네의 기억에 두고 있는 가치를 보고 평가하겠네."
"…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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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웬 기계들이 머리를 가득 에워싸고 일제히 빛을 발했다. 사람이 죽기 전에 그는 그가 겪어온 삶은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다고 했던가? 그것을 주마등이라고 했던가? 여하튼 난 그것을 보았다. 삶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내가 그 작은 눈을 뜨면서 본 수술실 안의 풍경과 잠시 후 날 보며 기뻐하는 두 남녀와 나의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유년시절,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선 초등학교의 교문에 쓰여진 교패를 보며 좋아하던 것이 보였다. 잠시동안이었지만 내 입가에 머문 미소는 일이 끝나 노인이 내 손에 한 뭉치의 돈을 얹어주면서 싱긋 웃을 때까지 지워질 줄을 몰랐다. 한 뭉치 두 뭉치 세 뭉치… 열다섯 뭉치, 1500 만원이었다.
"안타깝게도 자네는 자네의 유년시절을 즐겁게, 그리 의미 있게는 보내지 않은 듯 하구만. 때문에 그리 많이는 못 주겠네."
하지만 나에겐 충분한 돈이었다. 이 돈이면 사채업자에게 돈을 갚고 잃어버린 나의 것들 중 일부를 되찾을 수 있겠지.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나의 유년시절을 생각할 수 없을 거야. 내 속에서 영영 파괴되어 버렸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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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뛸 듯이 기쁜 날. 나의 추억 속엔 나의 삶 전부를 바쳐도 모자란 여자가 있다. 미치도록 사랑해서 오직 순종만을 바치고 싶은 그녀, 나에겐 그 이상 소중한 것은 아마 없을 듯 하다. 내가 중학교에 다닌 지 2년이 될 때 만난 사람이었다. 하얀 피부에 눈웃음이 아름다워 쉽게 빠져들어 버렸던 나. 그저 내 몸에 베인 그녀의 향기조차도 사랑스러웠던 그때의 추억이 아련히 눈앞에 열렸다. 공항의 게이트를 바라보던 내 표정에 환희가 어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외국으로 떠나버린 그녀의 모습이 다시 보이는 오늘, 지금의 이 행복을, 영원히 간직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왔니?"
눈가에서 떨어져 나가는 눈물이 그토록이나 반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내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들었던 흐느낌은, 나의 것이었을까 그녀의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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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三月)의 동풍(東風)은 그렇게 내게 불어왔다. 언제나 같을 거라고 믿어왔던 저 햇살도 바람도, 나의 얼굴에 부딪히며 나에게 행복을 부여하는 것은, 그렇게 그녀를 원하면 안을 수 있는 그날이후의 나의 봄이었다. 그간 느낀 아픔도 시련도, 그녀의 눈웃음으로 모두 해소되는 걸 느끼는 것은, 어쩌면 나의 삶에 대한 의미가 가장 커다랗게 되어버린 시간에 허락되는 선물인지도 몰랐다. 어머니의 품에서 꾼 꿈도 이보단 덜 포근했으리, 그저 그녈 보는 것만으로 내 몸을 감싸는 푸근함은 11시경 잠자리에 빠져들며 코 아래로 덮힌 이불에 부딪힌 숨결이 입술로 흘러 들어올 때의 그것과 같았고 열어놓은 창문 탓에 불어온 새벽 공기가 얼굴을 차갑게 얼릴 때 이불 속으로 빠져 들어가며 침대에 몸을 부빌때의 그것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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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
"응…."
내 입술에 부딪힌 그녀 입술의 따스함, 새하얀 달빛, 눈부시게 아름답고 시린 달빛조차 주지 못하는 오늘밤의 의미를, 나는 그녀의 입술에서 만족하며 더 깊이 그녀를 안았다. 내 사랑. 언제까지고 타오를 내 사랑. 연료 없이도, 산소 없이도 영원히 타오를 내 사랑. 그 무엇이 어떤 방법으로 도전해와도, 당당히 그녈 지켜낼 수 있을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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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늘이 굉장히 어두웠다. 잿빛, 그 장엄한 잿빛 하늘은 붉은 적란운에 슬픔을 담아 띄우고, 곧 이어 눈물을 흘렸다. 창 밖으로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이고 우르릉 소리가 꽤나 크게 들려왔던 듯도 하다. 그럼에도 입가에 드리운 미소는 지울 줄 몰랐지만, 손에 든 우유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쨍그랑!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운 것 이었나보다. 입에 대자마자 놀라 떨어뜨려 버린걸. 땅에서 흩어진 머그 컵 조각이 애처로와 보인다. 걸레를 가져와 우유를 닦고 깨진 컵 조각을 치웠다. 그러던 중 손이 두 번이나 베었다.
"음악을…"
천둥소리가 귓가를 심하게 때리는 게 안타까웠다. 내 귀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렇게 때리는 것인지, 한 장의 반창고처럼, 부드러운 연고처럼, 내 귀는 음악을 원했다.
-Thanks god It's Friday ~♩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음악과, 빗소리와, 천둥소리와 어울려 멋진 화음을 자아내는 전화벨소리. 들떠있는 기분을 가라앉히며 든 수화기에서 흘러나온 것은 상당히 다급한 듯이 말을 더듬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제길!"
빗속을 달렸다. 차가 있었으면 좋았을걸, 비가 얼굴을 심하게 두들겨 대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별이 가지 않는 짭짤한 물기가 입 속으로 스며 들어왔다. 택시를 잡고 급하게 병원의 이름을 부른다. 출발하는 택시 안에 나는 앉아있지만 나는 같이 달리고 있었다. 빗물이 흐르지 않는 얼굴에서 드디어 눈물과 빗물이 구별이 갔다. 제발… 제발 무사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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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상태에 빠진 그녀는 마치 인형처럼 그렇게 누워있었다. 차갑게 언 피부와 젖은 머릿결, 그 희고 작은 손을 잡으며 난 오열했다. 슬픔이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시간. 견뎌내기에 그리 쉽지만은 않았던 시간. 그 하룻밤, 내가 밤을 지새며 흘린 눈물은 내 옆에 놓여진 젖은 손수건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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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기념으로 고등학교 때 동창들과 모여 놀았다고 한다. 비가 쏟아지기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예감한 그녀는 그녀의 친구 집으로 같이 걸음을 옮기다가 차에 치었다고 한다. 아까까지 술을 먹고 운전한 그 가해자의 멱살을 쥐고 욕을 내뱉던 내가 우스워 견딜 수가 없다. 전에 나도 그런 주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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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대한 수술비 때문에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며 돌아다니는 그녀의 부모님이 안타까워 보였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은데, 그녀의 모든 걸 책임 질 수 있을 듯 싶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 정도의 일에도 책임은커녕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 보인다. 수술비용… 수술비용…. 저번의 그 일이 생각났다. 사채업자의 돈을 갚기 위해 찾아간 그곳, 그 초라한 건물이 아스라이 기억 속에 피어올랐다. 그때는 태어나서부터 8살 봄까지의 약 7년의 기억을 잃었지. 그 7년의 기억으로 내가 받은 것은 1500 만원이라는 거금이었다. 수술비용은 3000만원 가량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가볼까, 도박이다. 그 노인은 내 유년시절에 내가 둔 의미가 그리 크지 않아서 그 정도밖에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이번엔 어떨까? 8살부터 7년. 중학교 1학년 때까지의 기억. 그 기억이라면 어느 정도나 받을 수 있을까? 그녀의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빗속을 뚫고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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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만원이요?"
"그렇다네. 그 이상은 줄 수 없네. 자네의 유년시절보다야 훨씬 의식이 진보했으니 더 많은 액수를 받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허나 더 이상 줄 수는 없네. 그래도 이 정도면 꽤나 많이 준 것이야!"
"그런...!"
노인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직 내 기억을 넘긴 것은 아니었고 그저 가격의 측정이 있었을 뿐이었다. 2000 만원. 초등학교 입학부터 중학교 입학 후 1년까지의 기억의 액수였다. 적지 않은 돈,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수술비를 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비용이었다.
"흠, 그러나..."
노인이 말을 덧붙였다. 역접. 부정의사 다음에 나오는 역접은 긍정의사일 가능성이 높다.
"자네의 그 7년의 기억 다음해의 기억은 1000 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을 듯도 싶은데... 어떤가?"
다음해? 그 다음해? 중학교 2학년 때를 말하는 것인가? 어째서?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둔 의미가 어떤 것이기에 그렇게 큰 액수를 받는 것이지? 궁금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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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지금과는 7년이란 거리로 멀어져 있는 추억의 한 페이지였다. 내가 그것을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을 즈음, 머리에 걸린 여러 장치들이 발하는 빛이 눈에 걸려 있을 즈음, 내가 바라본 것은 오늘 오전의 개인 하늘과 다르지 않는 7년 전의 푸른 하늘이었다. 뭉게뭉게 구름이 조각 조각으로 걸려있던 하늘. 난 그 1년의 파노라마를 되짚어 보게 되었다. 오른쪽 하단에 작게 표시된 작은 사각형 안에는 마치 가격표인 양 시간과 가격을 나타내는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우스웠다.
"네가 우리 반에서 몇 등으로 들어왔니?"
생각이 난다. 저것은 중학교 2학년에 처음 올라와, 전교 1등을 하는 친구와의 첫 만남이었다. 잘 짜여진 한편의 영화처럼, 나의 어린 모습을 한 아이가 웃으며 말한다.
"5등"
내가 5등으로 올라왔던가, 아 참, 난 중학교 1학년 때 공부를 워낙 못했었지. 이따위 딴 생각을 하느라 그 친구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내 모습을 한 아이는 또 입가에 어린 미소를 더 크게 만들며 대답한다.
"응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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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찡--
내가 다음으로 본 것은 한 선생님이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용모의 여 선생님이었는데 그때 나의 심장 언저리에서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내 마음이 그 선생님을 향해 움직이는 소리였다. 그렇게 뭔지 딱히 정의하기 힘든 감정이 마음 속을 깊게 짓눌렀던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 그 선생님이 담당하는 나의 그 과목 점수는 굉장히 높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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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11월 경. 늦가을 초겨울이었다. 하늘에서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하얀 무언가가 늦은 가을비였는지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의 애매한 그 시간. 그 날 밤 내가 만난 것은 김이 나는 따뜻한 코코아 한잔에 기대어 첫눈의 아름다움에 빠져든 한 소녀, 지금 나의 사랑이 머물고 있는, 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그녀였다.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되었다. 저 7년 전의 기억. 너무도 소중해서 지금도 내 일기 속에, 내 앨범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을 저 기억이 지금 이 기억매매의 상품이 된다. 저 소중함이…. 저 소중함이 고작 1000 만원의 대가로 사라진다. 내 속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그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러나 팔지 않으면 그녀는 죽을 지도 모른다.
소녀와 소년의 행동 하나하나에 배어있는 수줍음은 지금 이렇게 제 3자가 되어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까지 감동을 준다. 나의 이야기였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이렇게 남이 되어 바라보고 있는 나는 저때의 기억에 영원히 의미를 줄 것으로 생각된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내민 소년의 손을 감아쥐는 소녀, 그 얼굴에 떠오른 수줍음에 겨운 미소가 흩날리는 눈발과 어울려 빛나고 있다. 추운 공간에서의 따뜻한 포옹. 소년의 품에 안긴 소녀가 그저 행복해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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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눈물을 닦는 사이에 1년의 추억이 여운을 남기며 내게서 멀어져 갔다. 기계의 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리며 동시에 떠지는 눈이 축축한 이유는 아직 내게 남아있는 해답, 그 해답이 불분명한 탓이었다. 조용하고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노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뿐이다. 어떤 대답,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에 남았다. 수많은 상황들 장면들, 방금 본 꿈결같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며 울고 싶었다. 그러나 울지는 못했다.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그녀의 눈가에도 흐르지 않는 눈물. 내가 흘릴 수는 없었다.
"팔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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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그녀는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난 지금 7년 전 그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는데, 아무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하얗고 작은 손을 보면, 무언가 떠오르려 하면서도 가라앉는 그것이 무엇인지 답답했다. 가슴속에 진 응어리가 비수가 되어 파고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가 내게 보여준 것은 나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그 표정과, 그저 해맑은 미소와, 나의 심각한 표정이 궁금해 죽겠다는 듯한 눈빛뿐이었다. 뭐, 그래도 난 상관없었다. 그녀가 무사히 살아 이렇게 내 옆에서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더 이상의 행복은 바라지도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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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별이 아름다운 밤을 볼 수 있었다. 한잔의 와인이 곁에 놓이고, 밤 공기가 천천히 스며들어오는 이 발코니의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아 바라보는 밤하늘. 셀 수 없이 많이 떠 밤하늘을 빛나게 하는 별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인다. 그리고, 내 앞에 앉은 그녀의 눈에 머문 별들 역시도….
내 기억을 사간 그 노인도 이 별을 바라보고 있을테지. 지금 내 머릿속엔 15년 치의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7년의 기억만이 쓸쓸히 자리하고 있겠지만 기억을 사간 노인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입술이 와닿는 그 순간, 난 직감했었지. 내 모자란 기억. 내 앞에 있는 그녀가 채워 줄 거라고. 내 머릿속엔 그녀와의 첫 만남이 그려지지 않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리고 있을테지. 난 그녈 느끼는 순간 그녀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될테고.
결국 그녀가 내게 있는 동안, 내가 잃은 건 없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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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녀가 입원해 있던 병원의 의사가 나를 불렀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약이나 환자의 안정유지에 대한 조언을 들려주려는 것이겠지. 잃은 기억 대신 더 커다란 그녀의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나. 이제 더 이상의 불행은 없을 것이다. 우린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가며 그렇게 행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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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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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오늘 오전 그 병원의 의사가 한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걸음이 이상해지고 조금씩 땅이 가까워지고 하늘이 멀어진다.
-쿵
넘어진 것 같지만 넘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 몸을 세게 강타한 땅이 원망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때문에 일어설 수도,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다. 웃음이 나온다.
"히힛, 히힛,"
뭘 잘못했기에,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인가? 모든 것을 다 버려가며 그녀만 사랑한 것이 죄였던가? 잃은 기억을 그녀에게 의지하려 했던 게 잘못되었던 것이었던가? 그랬던가?
"아하하--!"
입은 웃고 있지만 눈물은 하염없이 흐른다. 멈출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그저 하염없이 흐른다. 오전에 의사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말. 어째서 난 많은 기억을 잃었으면서도 정작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은 버리지 못하는가?
'사고의 후유증으로 기억상실증이 나타날 가능성이 57 %로 대단히 높습니다. 혹시 환자가 이상한 말이나 몸짓,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눈빛을 보이거나 하지는 않던가요?'
"그래, 그거였어…. 그녀의 눈빛은…, 결국 그거였던 거야."
"하하하"
나는 그렇게 또 한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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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후…
예식장.
"신랑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신부를 항상 사랑하며, 신부의 모든 것을 기억하며 애정과 헌신으로 보살피고 존중해 줄 것을, 맹세합니까?"
주례사의 언제나 같은 대사, 하지만 모든 시작하는 부부들에게는 항상 새롭고 멋지며, 새 삶에 대한 첫 언도를 표하는 그 대사. 나는 입가에 스며오는 미소를 지울 길이 없었고 그렇게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모든 모습을 기억할 자신은 없습니다."
예식장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여기저기서 수군수군 대는 소리가 들리고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도 의아함으로 엉켰다.
"하지만…"
역접이다. 부정의사에서 역접이 등장할 때는 긍정의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기억과 그녀가 잃은 기억에 대해 던지던 절망과 회의에 복수하듯 그렇게 말했다.
"모든 모습을, 그녀의 모든 모습을 사랑하겠습니다."
그 표정들, 의아함에서 환희로 벅차 오르는 표정들, 그 표정들을 보며 나는 환하게 웃었다. 이 모든 것들, 그 모든 것들. 우리는 서로 잃은 것을 서로에게 의지하며 그렇게 행복해 갈 것이다. 우리에게 닥쳐왔던 시련들, 고난들, 이제 모두 이겨냈으니. 남은 것은 우리 삶에 남은 부분을 화환으로 채우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운명은, 때론 생각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가곤 한다.
그 좌표와 나침반 없는 항해에서 살아남는 것은, 항해사들의 순간의 선택과, 신이 만든 기로에서 신이 주는 가호의 유무에 달린 것이다. 그리고 그 항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얻는 것은 그 사람의 남은 평생동안을 채워줄 그들만의 행복이다.】